채란 문학실

산기슭

미송 2022. 2. 9. 11:02

 

페르난두 페소아의 도시-Lisbon 대항해시대 기념비 "The Monument to the Discoveries"

 

 

산기슭 / 오정자

서늘한 비 산 꼭대기에 얹혀 있네 잿빛 구름이 산을 부둥켜 안고 있네

아무런 경고도 없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렇게 찌그러진 물방울 구슬 내 젖가슴에 스며드네

까칠한 내 몸 파고드네 나는 숨을 색색 몰아 쉬며 휘청휘청 산길을 내려오네

흙바람이 산기슭에 머무네 누런 갈색의 돌멩이들 빙빙 휘돌며 산산이 부서지고

갓 올라온 억새풀 와스스 내 옆으로 물갈래 솟구치며 내려가네 힘차게 솟구치며

얼마를 내려왔을까 산 꼭대기를 쳐다보면서 입때껏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네

솔바람 세차게 불어 구름 곁으로 구름 곁으로 살며시 햇살 내려올 때 잿빛 구름

잿빛 구름 엉켜 엉켜 합치며 흩어지며 아찔아찔한 포말을 뿌리네

저 건너 강 사이 무지개 원색으로 얼굴 표정 밝히고 있네

그때 나 숨 고르지 않았어 전혀 고르지 않았다

낭창낭창 드리워진 수양버들이 조용히 포효하는 쉼터에서.

 

 

 

 

자연에 있는 높은 산 정상에 다다르면 우리는 뭔가 특권을 얻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발을 디디고 선 산보다 더 높이 솟아 있다. 자연의 최고봉이 최소한 이 지역의 최고봉이 이 자리에 우리의 발아래에 있다. 우리가 그 곳에 서면 우리는 볼 수 있는 세계의 왕이 된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우리보다 낮다.

 

인생은 가파른 비탈이다. 인생은 우리 자신이 다다른 구릉과 산들의 발치에서 누워 쉬고 있는 평원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우연이고 계략이며 우리가 다다랐던 위대한 고지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도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커지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더 높은 곳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면 사람은 숨쉬기가 더 편안하고 유명해지면 사람은 더 자유롭다. 심지어는 귀족 작위조차 조그만 산의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은 현혹이지만 현혹은 결코 우리의 작품이 아니다. 우리는 산을 오르거나 혹은 산으로 올려지거나 혹은 산 위에 있는 집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반면에 정말로 위대한 자는 계곡에서 하늘로 이르는 거리와 산 정상에서 하늘로 이르는 거리가 사실은 차이가 없다고 깨달은 사람이다.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하면 그때는 산 위에 있는 것이 좋겠으나 만약 제우스 신이 분노의 번갯불로 우리를 벌하려 하거나 아이올로스의 바람(아이올로스는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항해하는데 방해가 되는 바람을 자루 속에 감금시켰다)이 풀려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계곡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으며 땅바닥에 배를 깔고 납작 엎드리는 편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정말로 현명한 자는 정상을 정복할 만큼 튼튼한 근육을 갖고 있으면서도 통찰력으로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선으로 모든 산들을 차지하고 그 자리에 있기만 함으로써 모든 계곡을 장악한다. 산 정상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은 산 위에서 그 빛을 온 몸으로 받는 사람보다 계곡에 있는 그에게 더욱더 찬란한 광채가 된다. 숲속에서 우뚝 솟아난 성은 그 안에 갇힌 채 성 자체를 잊어버리는 사람보다 계곡 아래에서 그것을 올려다보는 그에게 더욱 아름답다. 나는 이런 생각에서 위안을 찾는다. 삶은 나를 위로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와 영혼의 방랑자인 내가 도심 저 지대의 거리를 지나 테부 강변으로 걸어갈 때 은유와 상징이 현실에 섞여 들어간다. 이미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은 마지막 태양빛 속에서 수많은 겹의 영롱한 햇살을 등진 리스본의 언덕들이 낯선 명예처럼 빛나는 후광을 이고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pp147-148

 

 

Fernando Pessoa 1888 ~ 1935

1888년 포르투칼 리스본에서 태어나 양아버지가 영사로 근무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5년 그곳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무역통신문 번역가로 일하며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생전에 그는 몇 편의 시를 발표했을 뿐, 작가로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후 발견된 유고는 시와 드라마 초고, 정치적 에세이등을 포함하여 모두 27,543매나 되었다. 그중 1982년 출간된 유작산문집은 문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그는 포르투칼 현대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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