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허공의 산책

미송 2022. 9. 1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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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오직 픽션일 뿐임을 아는자들,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쓰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자들은 행복하다. 비밀스럽게 글을 쓰기 위해 궁전대신의 신분에 정박한 마키아벨리처럼.

-페루난두 페소아

 

 

허공의 산책 / 오정자

 

바람 묻은 창이 가을이다

바람 냄새 발칙한

바람과 오래전부터 나는

바람과 화해하고 싶었다 신파를 몰고 온

바람과 내가 원래 하나였을 거라고

바람을 일으키려다 툭 떨어지는 잎들

바람에 대한 경고를 던질 때마다 신소리 라며

바람이 웃는다

 

바람이 우는지 달싹댄다

바람이 천박하거나 비참한 것에 대하여

바람이 고뇌이거나 쓸쓸한 것에 대하여

바람이 선지자처럼 말할 때

바람의 목소리가 가을이다

바람을 따라 도주하려던 머리를 돌려

바람을 쓰고 있는

바람과 나

바람을 쓰고 있는 나와

바람이었던 나

바람은 사치스럽고 벌레같고 절벽같고 외롭고

바람은 또한 나와 같아서

 

 

 Blowing Wind

 

가을이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리스와 카드를 만들자는 제안까지 있었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이 시가 떠오른다. 금궤에 돈이 부족해, 근무시간 외 더 일할 것을 거절하는 직장. 나홀로 빨빨대는 건 전근대적 행동이다.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바람을 해석하는 방식. 바람과 나의 순서가 바뀌며 가을의 숨결이 느껴지는 시각. 떠나가버린 것들의 소중함을  더듬고 있다.  <오> 20151102-202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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