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둥글다'는 말을 명사형으로 만들려면 '둥금'이라 해야 할지 '둥긂'이라 해야 할지 망설여질 때가 있다. '살다'의 명사형이 '삶'인 것으로 봐서는 '둥긂'이라 해야 할 테지만 그 말에는 어떤 짐승의 내장처럼 하릴없이 포개지고, 지나가는 발길에 여러 번 밟힌 팻트병처럼 쭈그러진 어떤 느낌이 있어, 본래의 '둥글다'는 말이 가진 반듯하고 단정한 느낌이 다 사라진 듯하다. 그래서 나는 맞춤법에 맞든 안맞든 '둥금'이라고 써야겠다고 선뜻 마음을 정한다. 물론 거기에도 내장을 다 걷어낸 짐승의 뱃속처럼 휑한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일출의 수평선에 나타나는 여리면서도 선명한 금, 날카롭게 갈라진 사금파리 같은 금, 때로 얇다란 종잇장처럼 손가락을 베이게 만드는 금이 있다.
이성복 [오름 오르다, 현대문학]
20210523-202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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