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광복절에 출소하신 선생님 한 분이 편지를 보내 왔는데, 집에 들어가서 처음엔 물건을 찾으러 이방 저방 다니고 왔다갔다 하는 게 너무도 이상했다는 거야. 이십 년을 팔 닿는 거리에 물건을 두고 생활하다가 갑자기 넓어진 공간에서 물건을 찾아 왔다갔다하는 게 너무도 낯설었다는 거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극미와 극대의 세계만이 있는 거야. 극미의 세계는 독방 속의 지리한 일상들이고, 극대는 징역 밖의 그리운 이들과 세상 소식들이지. 중간이란 게 없어.
극미와 극대만을 체험하는 사람은 성격도 그와 비슷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작은 일에 지극히 소심하게 집착하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큰 꿈을 품기도 하고,
나한테서 혹시 그런 것 느끼지 못하겠니? 그러기에 우리 수인들에게 있어 이 ‘편지하는 행위’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단다.
황대권 야생초 편지 中
침대 주변으로 돌탑 쌓듯 크고 작은 물건들을 쟁여두고 사는 분을 알고 있다. 내 맘 같아선 언제라도 정리정돈을 해 주고 싶은데 하나라도 손대지 말라 엄포를 놓으니, 손닿는 곳에 놓여진 물건들에서 평안을 찾는다고 하니, 선방 차리잔 설득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 인생 제반사가 중간지대를 찾는 일. 안 그러면 가지가지 병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도 아프지 않은 구석은 없다. 기형도 시인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로 운을 떼는 빈집이란 시 말미에도 나온다.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일. 문의 안과 밖 경계를 스스로 긋는 일. 극미와 극대. 양극화.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중간지대의 스펙트럼을 외면하는 광기와 폭력의 시대. 박쥐 아니면 이카로스의 광폭 행진.
야생초는 웃는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고 야생초가 말을 하더라도 야생초는 웃는다고 나는 믿는다. <오>
20211231-2023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