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촌에는 탄광개발을 위한 다이너마이트가 곳곳에 있었으므로 보유 무기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미 광부들은 무기고와 화약고까지 점거하여 만일의 비상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광부들이 무기까지 장악하자 외부에서는 사북지역을 노동자의 천하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광부들은 막장동지애를 통한 강한 결속력을 토대로 집단행동에 있어 폭발력을 가졌다. 평소에 억누르던 감정과 분노를 일순간에 폭발시킨 광부들의 파괴력은 상상력을 초월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면서 가장 놀란 것은 독재정권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1979년 12·12라는 군사 쿠데타를 거쳐 총으로 권력을 잡은 뒤 대통령까지 허수아비로 다룰 만큼 무소불위였다. 계엄통치로 민주 평등 인권에 대해 철권을 휘두르던 군사독재정권도 무지렁이 같은 광부들이 거침없이 전개하는 강력한 민중저항 앞에는 적잖이 당황했다. 군사정권에서는 사태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군인들을 투입할 계획까지 세웠다.
사북항쟁은 4월24일 노동자 대표들과 정부당국과의 협상 끝에 적극적인 타결을 보았다. 노조지부장 사퇴, 사태 수습에 경찰의 실력행사 배제 등 11개 사항을 합의하면서 막을 내렸다. 도시까지 점거하면서 4일 간 치열하게 전개된 사북항쟁은 탄광노동자들이 지닌 한과 분노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참고 견디던 분노의 폭발은 부조리한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의 한이었다.
그 한은 막장인생을 살고 있는 노동자 개인에서 출발되었으나 모순된 산업현실과 인권의 탄압에 맞서는 사회적 분노로 승화했다. 광부들의 좌절과 분노는 개인적 차원의 불행이면서도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긴밀한 상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사북지역은 연일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안에도 언론에는 사북에 대한 기사가 한 줄도 나가지 않았다. 사건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민심이 들끓을 것을 우려한 군부독재가 통제한 때문이다. 군사독재정권의 검열을 받던 언론에서는 사태가 종결 될 무렵에야 보도를 허용했다. 1980년은 언론의 자유조차 없던 암울한 시대였으니 광부들의 인권이야 오죽했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언론에서는 보도가 허용되자마자 사북항쟁의 과정을 쏟아냈다. 그런데 노동자의 인권적 측면같은 사태의 본질보다는 노조파벌끼리의 싸움이거나 불순분자의 난동에 초점을 맞췄다. ‘술 취한 광부들의 집단난동’, ‘무지렁이들의 폭동’, ‘불순세력의 폭동’ 등으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폭도나 술 취한 광부들의 불순한 행위를 부각시켜 노동자의 인권을 쟁취하려는 노동 투쟁의 의미를 왜곡시켰다. 탄광노동자들이 스스로 지키고 나선 화약고와 무기고를 탈취한 것으로 보도하면서 사주를 받았거나 불순한 의도를 지닌 폭도처럼 몰아갔다.
하지만 사북지역은 무법천지가 아니라 탄광노동자들 스스로 치안을 돌보면서 질서를 지켜냈다. 미국방부의 ‘메시지센터’에서 1980년 5월8일 작성한 비밀문서에 의하면 진압에 동원되던 특전사 군인들조차 사북광부들의 주장을 타당하게 여겼다.
1979년 부산․마산 소요사태 당시, 파견된 특전사 소속 장교와 사병들은 ‘머리를 깰’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럴 의지도 있었음. 가장 최근 원주에서 대기상태에 있었을 때 태도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음. 광부들의 의견이 옳다는 의견들을 피력한 바 있음. 광부들의 임금인상 요구는 옳다는 것이었음.(이홍환 편저, 『미국비밀문서로 본 한국현대사 35장면』, 삼인, 2002, p.64.)
사북항쟁은 11개 합의사항이 있었지만 실천될 수 있도록 지킬 수 있는 노동자들의 조직력이 없었다. 합의 당시 노동운동 관련자 선처와 노동인권 개선을 약속했으나 합동수사반은 4월27일부터 체포 대상자 조사에 들어갔다.
황인오는「사북사태 진상보고서」란 글을 통해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자신들이 사태발생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손상당한 위신만을 고려한 듯 무리한 수사를 강행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급기야 5월6일에는 회의를 핑계로 노동자 대표들을 모은 뒤 군인이 들이닥쳐 체포하는 비열한 수법까지 동원되었다.
계엄사령부는 8월4일 81명을 계엄군법회의에 회부했으며 주동인물 이원갑·신혁이·신경·조행웅·신천수 씨 등 31명을 구속했다. 군부 조사실로 끌려간 81명은 각종 고문과 구타로 석방하자마자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평생 동안 병치레를 했다. 탄광노동자의 인권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숭고한 투쟁의 막을 올리고도 주동자들의 구속으로 사북항쟁의 정신 계승은 난항을 겪는다.
사북항쟁은 계획된 노동운동이 아니었다. 이익에만 눈이 어두운 탄광기업주, 노동자는 외면하고 회사 편이 된 노조간부, 회사와 노조간부만 두둔하면서 노동자를 멸시한 경찰의 삼박자가 빚은 우발적 사태였다. 특히 제3자라 할 수 있는 경찰의 과잉 개입으로 사태가 확대되었으니 사북항쟁의 기록마다 무능한 경찰을 지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4월 25일 정부의 합동조사반과 신민당 진상조사반 등과의 면담에서 노동자들은 ‘앞으로 노사간의 문제는 당국이 개입하지 말라’면서 공권력 개입의 배제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노동자 스스로 고통스럽고 모순된 현실을 타개하려는 극복 의지는 탄광노동운동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사북 항쟁은 노동자들이 수십 년을 참아 온 절망과 분노를 표출하는 통로였다. 그리하여 사북항쟁은 부조리한 노동 현실을 타개하려는 크고 작은 노동투쟁으로 계승되었다.
사북항쟁은 부산 파이프, 동국제강, 금강제화, 원진레이온, 신일인쇄 등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운동의 불씨를 제공했다. 새봄을 향해 일어선 노동자들의 인권과 민주화 열기는 사북항쟁이 있고 난 한 달 뒤 5.18 광주민주항쟁을 맞이한다. 1970년대의 노동자 각성이 전태일에서 출발되었다면, 1980년대의 노동자 각성은 사북의 광부들에게서 확인되었다. 산업화 과정 속에 유린되던 노동자의 인권실상을 세상에 알린 값진 사건이었다.
사북항쟁은 우리 사회에 광부의 존재를 분명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 당선 이후 처음 방문한 곳이 사북광업소일 만큼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또한 사북항쟁이 보여준 광부의 과격한 시위전력은 탄광노동운동에 있어 정부나 회사 측에 상당한 위협으로 작용했다.
민중저항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사북항쟁은 탄광노동운동사에서 단연 으뜸에 자리한다. 따라서 사북항쟁에 대한 역사적 조명과 항쟁정신의 승계에 보다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 사상 최고의 저항 형태를 보여준 사북항쟁은 오랜 시간동안 ‘사북 폭동’, ‘광부들의 폭동’ 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모진 세월을 견디어야 했다. 신문 기사의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4월 24일 경향신문 광부 3천5백여 명 집단난동-사북읍 4일째 점거, 동아일보 광부 700여 명 유혈난동-사북읍 점거 나흘, 조선일보 무법 휩쓴 공포의 탄광촌-지서 습격, 파괴…, 서울신문 기사 1 -동원탄좌 광부 3천여 명 유혈난동, 기사 2 - 사북난동 경제계에 큰 충격, 서울신문 사설 ‘이 무슨 무법 세상인가-난동사건을 우려하고 개탄한다’
사북항쟁은 탄광노동자의 인권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하면서 표출되었지만 당시 대다수 언론에서는 왜곡 보도로 일관했다. 언론은 노동자와 경찰과의 투석전, 노조지부장 부인의 린치사건을 전면에 내세웠다.
물론 이러한 언론의 보도 행태 뒤에는 ‘무지렁이들의 폭동’이거나 ‘술 취한 광부들의 무법천지’ 등으로 몰고 가려는 신군부의 노골적인 개입이 있었다. 노동자의 인권저항 운동이 아니라 술 취한 탄광노동자들의 난동으로 몰아가고자 했다. 보도 내용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부 광부들은 술에 취해 닥치는 대로 기물을 부수고 몽둥이와 곡괭이를 휘두르며 난동을 벌였지만”(《경향신문》사설, 1980. 4. 25.)
“술을 마시고 과격해진 이들의 난동에 광부가족까지 합세, 한때 7천명까지 늘어났던 난동군중들은 출동한 경찰관과 투석전으로 맞서 경찰관 1명이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숨졌고”(〈광부 3천5백여 명 집단난동〉,《경향신문》,1980. 4. 24.)
“광부들은 술에 취한채 사북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육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교통을 차단, 사북파출소 광업소사무실 등을 파괴하는 등 사북일원의 행정을 마비시키고 거리를 휩쓸면서 무차별 폭력행사를 하는 바람에 사북읍 일대는 나흘째 고립상태”(〈광부 700여 명 유혈난동〉,《동아일보》, 1980.4.24)
“평화로웠던 광산촌이 광부들의 난동으로 하루 아침에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 연4일째 폭도로 변한 광부들에 의해 점거된 사북읍은 상가가 철시하고 주민들이 문을 걸어 잠근 가운데 술냄새를 풍기며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 광부들만 오가는 죽음의 거리였다”(〈무법 휩쓴 공포의 탄광촌〉,《조선일보》, 1980.4.24)
서울신문은 4월24일자 사설 제목에서부터 「이 무슨 무법 세상인가-광부난동 사건을 우려하고 개탄한다」라며 난동으로 몰뿐 아니라 “분규원인의 해결은 현시점에선 차후의 문제이다. 당장 시급한 것은 사북읍의 법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면서 사태의 본질은 외면했다.
김삼웅이 『곡필로 본 해방 50년』에서 사태의 본질보다는 광부들의 폭력성과 사회혼란에 초점을 맞춰 선정적으로 언론이 보도했다고 비판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사북항쟁에 대한 왜곡이나 의미 축소는 군사독재정권 아래 계엄사의 의도적인 조작, 그리고 정론의식이 없는 언론이 만든 합작품이었다.
사북사태가 끝나고 계엄사에서 사북사태를 보도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지자 현장에서 큰 곤혹을 치렀던 기자들은 폭동기사 쪽으로 유도하라는 계엄사의 보도지침에 충실하게 따랐다.
당시 신문들은 ‘곡괭이와 도끼로 무장, 파괴와 방화’, ‘부녀자들도 흉기 들고 가세’,‘사십대 남녀 피 흘리며 질질 끌려가다’, ‘술 취한 광부들 몰려다녀’, ‘기자들에게도 폭행’ 등의 대문짝만한 제목이 말해주듯 사실보다 상당히 과장된 내용이 많았다.(홍춘봉, 「광부아리랑」중에서)
결국 언론의 왜곡된 보도는 탄광노동자들을 더 오래도록 열악한 상황에 묶어 두었다.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뒤늦게 노동자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2001년 9월에는 주동자로 몰린 81명 중 연락이 닿는 30여명이 모여 ‘사북 노동항쟁 관련자 명예회복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조촐하게나마 해마다 기념식을 갖고 있다. 이원갑 추진위원장은 “인간 대접을 받으며 일하기 위해 전개된 노동 투쟁이 폭도로 매도당했다”며 국가에 명예회복을 신청했다. 사북항쟁을 이끌던 이원갑·신경 씨 등 2명은 25년만인 2005년 민주화운동자로 인정받아 개인적인 명예가 회복되었다.
석탄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사북주민의 생존권 찾기 투쟁 때마다 사북항쟁은 상기되었다. 지역현안을 정부 측에 요구할 때마다 제2의 사북항쟁을 예고하며 압박하곤 했다. 사북 주민의 힘으로 유치한 카지노라는 새 역사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사북항쟁의 저항정신에서 계승되었다. 사북지역 주민들에 있어 사북항쟁은 지역발전을 위한 대정부 협상카드로 지속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북지역 주민 사이에서는 사북항쟁을 지역의 정신과 승리의 표상으로 내세우는 것을 꺼리는 이가 많다. 탄광노동자가 승리하던 4월의 봄에 대한 사북지역 내부인과 외부인의 기억에는 괴리감이 있다.
사북에는 사북항쟁이 끝난 뒤에도 어용노조 싸움을 둘러싼 노동자 간의 반목, 노동자와 회사 측의 대립이 장기간 존재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북항쟁의 주역들이 인권침해의 가해자로 공격받기도 한다. 사북지역 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처는 사북항쟁을 진정한 지역의 정신으로 받들지 못하는 장애가 되었다.
2004년에는 사북항쟁의 진원지인 동원탄좌 사북광업소마저 폐광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사북항쟁을 진정한 노동자의 승리로 승화하기 위한 막장정신, 과거의 상처를 보듬고 미래로 나가려는 화해와 상생의 지혜이다. <끝>
<시> 사북은 봄날
정연수
꽃망울에 따라붙는 피바람, 진눈깨비에 묻어나는 봄바람
비단 1980년 뿐 이었을까만
꽃피는 봄날이라곤 없던 까막동네
봄을 막는 이 땅의 폭도들에 대항하여
사택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뼈다귀가 될 때까지 착암기 움켜쥐던 힘
6천 칼로리의 뜨거운 불꽃 제대로 뜨거워지던 사월 봄날
이 땅의 진짜 광부들이
검은 깃발, 붉은 머리띠 두르고 씨앗을 뿌리던 그 봄날
봄은 쉽게 가버리고 꽃씨는 땅 속으로만 발을 뻗어
머리 숙여 동발을 지고 노보리 오르는 검은 예수
때로는 막장에 묻히고, 때로는 진폐로 드러눕고
때로는 꽃씨를 뿌리는 폭도로 몰리고
남들 안가는 빛의 반대편에도 길을 닦으며
굳은살 박이도록 삽질하는 검은 예수
기세등등 1989년
광부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석탄합리화 폭동이 일어나고
봄눈처럼 순진한 이 땅의 광부들은 저항 한 번 못해보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꽃이 핀다고 거짓말만 하는
봄, 또 봄에 속아서 나들이를 나선다
서울은 근처도 못 가보고 그저 안산으로, 수원으로, 부천으로
남들이 가지 않는 공단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사북항쟁 24주년을 기념하여 문 닫은 동원탄좌
19공탄 구멍마다 푸른 불꽃을 뿜으며 뜨겁던 이 땅은
뼈다귀를 묻을 땅조차 없이 식어가도
아직 우리의 맥박은 뛰고 있다
이 땅의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노동을 탄압하는 폭도들과 당당히 맞선 사북의 광부
그 검은 피를 기억하는 이가 있는 한 우리의 예수는 부활한다
이제부터 봄을, 봄날을, 사북으로 고쳐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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