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나는 너의 입술에 키스했다
너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응축된
빨간 입술, 하나의 입맞춤은 너무나 짧아
번갯불보다 기적보다
오래 남았다
시간은
너에게 바친 시간은, 그 후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내게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전에 그 시간이 필요했었나보다
시간은 그때 시작하고 그때 그 속에서 끝났다
오늘 나는 하나의 입맞춤과 키스하고 있다
나는 나의 입술과 홀로 남았다
나는 나의 입술을
이제 너의 입이 아닌, 이제 그건 아닌
-아, 어디로 도망간 걸까-
네가 준 입맞춤 위에
내 입술을 댄다
어제 서로 키스하던 그 입맞춤의
그 한데 붙은 입술 위에
이 입맞춤은
침묵보다, 빛보다 오래간다
살도 입도 없는
자꾸만 달아나는 자꾸만 내게서 멀어져가는
원경을 향한다
아니다, 너를 키스하는 게 아니다
나의 키스는 더욱 멀리 가고 있다.
뻬드로 살리나스 (스페인, 1892~1951) 봄의 시, 사랑의 시. 1923년 <예감>에 이어 1929년 <확실한 우연> 그리고 1931년 <우화의 기호>를 펴냈다. 그의 마지막 시집에 실린 서정시에 내 입술을 자꾸 비쳐 본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으면 시체 같고 발라도 그닥 발개지지는 않는 입술.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물질계에 속한 몸은 시간의 잔인함을 거스를 수 없다.
입술을 어루만지는 일은 연민을 키우는 일, 발음할 때 부딪침조차 정겹게 느껴보는 일.
피하조직 괴사, 건조, 통증 없음, 감각 없음, 자연치유 안됨. 피부이식 수술 필요. 3도 화상의 결과 같은 첫 키스의 후유증을 안고 강을 건너온 우리.
공(空)한 입술들 위로 입맞춤의 에테르 가득하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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