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퇴고실

사슴의 뿔

미송 2021. 12. 2. 17:33

 

 

비가 멎질 않았다. 신열을 견디며 수정은 바닷가 모텔에 혼자 누워 있었다. 댓잎에 쓸리는 아린 감각처럼 웅성거리던 빗물이 덩그르르 떨어졌다. 핏방울이었을까. 아랫도리 어디쯤이 붉은 유령의 집처럼 휑뎅그레하여서 수경은 숙명적 물음을 물수제비로 띄우다 잠이 들었다.

 

잠깐 꿈을 꾸었을까. 중구난방 흩어지던 사념들이 차분해져 다시 눈을 떴을 때, 잠이란 가련한 신의 축복이로군, 중얼거렸다.

 

무엇이든 도를 지나치는 게 문제였다. 방어기제를 잘 동원하던 수경은 안으로 돌돌 말리는 법을 터득했다. 억측과 모순에 타협하지 않는 자세. 그런 기본자세로 수경은 종종 잠을 택했다.

 

잠을 자야만 꿈을 꾸는 건 아니었다. 자정 2시 무렵 눈을 뜬 채 꿈을 꾸고 있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귀엽게 느껴졌다. 꿈을 꾸는 것보다 포옹을 좋아하는 사람들. 쉬 동화되는 몸들이 새벽빛에 파리해지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육체적인 잠, 꿈, 지리멸렬한 사랑까지 그믐달을 닮아 있었다.

 

대체 사슴언니는 새벽까지 어디 있다가 집으로 간 거야. 모텔로 돌아와 함께 해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긴 사슴언니. 새벽달의 눈총을 받으며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단둘이서 만난 건 7년 만이었다. 7년 전 천안으로 이사한 수경은 전화로만 사슴언니와 연락하며 지내왔다. 여름 겨울 휴가 때는 가족들과 함께 만나기도 했다. 사슴언니의 목소리 톤은 호수의 물살 같았다. 비음 섞인 전화 목소리는 섹시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왜 날 내숭쟁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솔직한 여자한테 더 솔직하라고 닦달들이니...참”

 

사슴언니가 오해를 받을 소지는 있었다. 40대 후반인데도 40대 같지 않은 몸매. 개미허리에 다소곳한 자세까지. 그리고 희로애락이 얼굴에 도통 드러나지 않는 점. 그런 점 때문에 속내도 완벽한 내숭일거란 예단을 한 모양이다. 자기 위안을 얻는 방법도 다양하였다. 외람된 오해나 자가당착적 맹신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스스로조차도 해독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의 내면 보다 타인의 외양에 관심을 더 두는 사람들. 타인을 의식하는 습관은 불안의 증표일까.

 

사슴언니는 모처럼 은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듯 분위기를 잡더니만 수경을 모텔에 모셔놓고 외출을 하였다. 직원들이 송년모임을 갖고 있는 곳에 들렀다 얼른 빠져나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수경은 그녀의 아파트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4인용 식탁. 아들은 군대를 제대한 후 3학년에 복학할 예정이고 딸 다슬이는 곧 대학 새내기가 될 예정이었다. 38평 아파트에 남겨진 두 개의 빈 식탁의자, 그 하나에 수경은 앉았다. 누가 뭐래도 수경의 눈에 비친 사슴언니는 현모양처였다. 칼집을 자분자분 넣은 등심 요리라던가, 산 속까지 직접 가서 구해온 산더덕 요리라던가. 그녀의 손맛 또한 특별하였다.

 

여행 중 수경이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사슴언니였다. 눈동자에 천명처럼 박힌 슬픔. 미완의 낯빛을 은근히 감시하고 싶었다. 시간의 여과를 통해 정제된 관계,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관계란 얼마나 유연하고도 살맛나던가.

 

 

말만 있고 전이되는 감정이 없을 때, 제 이름을 잃는 건 사랑 뿐이 아니다.

 

허공의 새처럼 사슴언니는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 싶다고 늘 노래했다.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은 제발 피해주세요. 처량한 날개를 상상하며 수경이 놀리기도 했다.

 

“바다가 보이는 방으로 주세요.” 1월, 토요일이라 방값은 6만원이었다.

“그냥 자기네 집에서 자면 될 걸, 빈 방도 있는데...” 모텔에서 지내는 게 마뜩찮았으나 수경은 사슴언니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수경 자신이 먼저 속내를 털어 놀 것도 같아 공간이 필요했다.

 

혼자 남는다는 건 즐겁지 않다. 조명도 시트도 마음에 들었지만 사슴언니가 파티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수경은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창의 밤이 낯선 우수로 떴다. 삭막한 겨울 바다가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폭죽의 파열음만이 간헐적으로 들렸을 뿐 사람들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었다. 울긋불긋했던 장사꾼들의 인상들만 수경의 주변을 맴돌다 멀어져 갔다. 꾸리하게 접히는 파도, 바닷가 장사꾼들 다 굶어죽겠네, 하루살이들 걱정에 수경은 우울해졌다. 이왕에 도둑이려면 좀도둑 보다 대도가 낫다며 도둑놈을 대통령으로 뽑고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 자화자찬하는 광증이 공포스럽다. 주식에 빠져 천국과 지옥을 왕래하던 친구가 5년 만에 몇 억을 날렸다고 펑펑 울어 댔다. 주식에 통달한 듯 떠들던 그녀, 복잡다단하게 들리던 이야기들. 후유증으로 그녀의 건망증은 심각해졌다. 남의 생눈깔을 빼먹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자들에게선 비린내가 난다. 망한 사람만 억울하다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들. 인성을 파먹는 모리배들에 대해선 쉬쉬 하는 형국이 한 둘이 아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이면 죽을 때까지 붙어사는 거고 사랑이 아니면 죽음처럼 끝을 내야 한다. 사랑하기에 떠나 준다니 하는 개지랄을 갖고 불륜 드라마는 꾸준히 시청료를 챙기고 있다.

 

잠간이란 시간이 관념에 그쳤음을 수경은 몇 시간 후 알아차렸다. 내숭. 송년파티에 잠간 다녀올 테니 모텔에 남아 기다려달라고 한 사슴언니. 수경은 꿈속에서 기어 나와 궁시렁댔다. “할 말이 많으리라는 걸 예감했을 텐데...”“시방 날 알리바이로 설정해 놓고 방치기 중이다 이거지”

 

그녀는 새벽 4시까지 이쪽의 동태를 살피려는 문자를 간간 찍었다. 나 지금 노래방인데 술 많이 취했거든 미안해 혼자 있게 해서. 걱정 말고 더 놀다와요. 비슷한 문자가 서너 번 더 오고가다 수경은 잠을 청했다.

 

편집증 환자 같은 S에게 밤새워 시달림을 당할 때도 수경은 방어기제로 잠을 청했다.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 보다 잠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견딜만 했을까. 최면을 걸어 잠 속으로 빠져들던 수경은 호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해초들을 빗질하듯 어루만졌다. 벙긋 말을 붙이는 물고기 한 마리를 냉큼 잡았다. 그 순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이야기가 생각난 건 이상하다.

 

중세 교회의 신부였던 아벨라르에게 보내는 엘로이즈의 편지를 읽다가 사랑의 격정은 새장 입구의 윤활유와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카니발 축제의 가면들처럼 불경스러움을 깔고 있는 사랑.

 

“우리가 함께 향유했던 사랑의 기쁨들은 행복한 달콤함을 많이 가져다주었습니다. 저는 그 달콤함을 내던져 버릴 수가 없군요. 그 달콤함을 제 생각 밖으로 밀어낼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곳을 향해서 갈 수 있어요. 유혹적인 그림들이 항상 제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 미사를 드리는 한 가운데서조차 이 환상적이고 육감적인 영상들이 밀어 닥쳐 제 가련한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신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고백은 수 백 수 천 통의 편지로 남았다.

 

 

“어젯밤엔 너무 피곤해서 마지막 벨소리를 못 들었어요”

“잘 들어간 거죠?”

아침햇살이 사슴언니의 콧날로 내리 꽂히고 있었다. 불그스레한 얼굴에 타원형 미소를 머금으며

“으응...다슬이 아빠가 얼마나 재촉을 하는지 새벽에 집으로 곧장 들어가게 됐어 미안해”

“삐진 거 아니지?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서 실컷 얘기하자 응?”

그녀의 자동차 뒷자석에는 바구니를 벗어난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간밤의 교성처럼.

 

지붕의 들보를 깨부수고 의식 속에서 공의 심연으로 침잠한다. 도덕경의 요가 이론이 떠올랐다.

고대 심리학적 이론에 의하면 두뇌와 신체의 거친 물질 안에는 극히 일시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미세한 실체가 존재한다고 한다. 요가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러한 자발적 흐름을 통제하고 늦추고 마침내 정지시키는 것이다. 근본적 형상을 즐기기 위해 연못을 고요하게 할 수도 있고 변형의 유희를 즐기기 위해 바람을 불게하고 파도가 치게 할 수도 있다. 하나가 되는 자들은 이처럼 만물을 초월하는 동시에 만물 안에 내재한다. 마음으로 도를 해치는 일이 없고 사람이 자기의 일로 하늘이 하는 일에 간섭하려 하지 않으니 이러한 사람을 진인이라고 부른다. 기쁨과 노여움이 계절의 흐름같이 자연스럽고 모든 사물과 어울리므로 그 끝을 알 수 없다.

 

존재의 껍질을 깨고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영원성의 텅 빔 속에 황홀하게 남아 있으려는 사람은 텅 빔의 강박증을 즐기려는 자가 아닐지, 나 자신의 영광 속에 머무는 나에게 과거는 어디에 있으며 미래는 어디에 있는지, 현재는 어디에 있고 공간은 어디에 있는지, 아니 영원성마저 어디에 있는지.

 

단물을 쏟던 열매들 다 떨어진 나뭇가지가 수경의 어깨 위에서 으스스 떨고 있다. 꽃은 시들고 사랑의 불씨도 꺼지고 한 장 남은 이파리마저 떨어지고 나면 사계의 끝, 이후 거기서부터 다시 봄은 시작되겠지.

 

수경은 초조하지 않아 위선 없이 돌아가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침묵하였다.

 

“더 큰 갈등도 불행도 없이 이대로 그냥 흘러갈 것 같아.”

“노후에 땅도 물려받을 것이고 내 앞으로 아파트도 한 채 있으니, 이대로 살아야지 뭐”조수석에 앉은 수경의 옆모습을 힐금거리며 사슴언니가 한 말이었다.

 

“스스로 서곡을 울리고 어찌하든 행복하다 최면을 걸며 산다는 데야...” 수경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폭신폭신한 뱃살처럼 맛없는 거 아냐, 바람인지 갈잎인지 수런대기 시작했다. 운전하느라 앞만 보던 사슴언니는 그 싸인에 둔감하였고, 비스듬히 앉았던 수경은 날렵하게 몸을 일으켜 바람과 입맞춤 하였다. 앙상한 나무들이 연둣빛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20080130-20211202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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