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삼성(해심밀경2)

미송 2023. 12. 13. 23:03


상대성의 원리를 알아서 사물의 존재를 개념이나 언어로 토막내서 보지 않고, 한줄기의 당연한 연속으로 이어서 볼 때....

<해심밀경>과 유식사상 일반에 있어서 삼성이란  변계소집성, 의타기성,원성실성이다. 흔히 이 세가지를 줄여서 변의원 삼성이라고 부른다. 변계소집성의 머리글자인 변자, 의타기성의 머리글자인 의자, 원성실성의 머리글자인 원자를 모은 것이다.

변계소집성의 말뜻을 풀이하면 사람들이 알음알이의 머리로 분별심을 일으켜서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사물의 실체가 있는 것으로 잘못 집착하는 상태를 뜻한다.

의타기성은 상대적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인연관계를 말한다. 이 인연관계는 윤회로 가는 방향과 해탈이 깨달음으로 가는 방향이 있기 때문에 이 의타기성도 윤회의 가능성과 해탈의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의 해탈적인 면에 발휘되어서 사물존재의 실상이 공한 상태의 모습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뜻한다.

이 삼성은 불교교리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어렵다고 하는 유식불교의 기본적 교리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유식학에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면 너무 복잡하다. 그러나 우리 방식으로 쉽게 단순화시켜서 알아보도록 하자.

그러면 먼저 <해심밀경>에서의 부처님은 어떻게 이 변의원 삼성에 대해서 설명하는지 들어 보자. 덕본보살이 부처님께 여쭌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모든 사물의 존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보살들을 말씀하시는데 어떤 점을 기준으로 사물의 여실한 존재실상을 파악한다고 말씀하시나이까?

<해심밀경>의 언어와 구조를 그대로 옮기면 일반대중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쉽게 풀이했다. 부처님은 일체의 사건과 물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진리의 모습을 파악한 보살을 말씀하시는데 여실하게 사물을 보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부처님이 답하신다.

좋은 말이다, 덕본이여, 그대가 지금 깊은 뜻을 여래에게 물었도다.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고 편안하게 하고자 해서 이러한 물음을 내었도다. 내가 설명해 줄 터이니 그대는 자세히 들으라.

이른바 사물의 참다운 모습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이니라. 어떤 것이 변계소집성 즉 분별해서 이름을 붙이고는 거기에 집착하는 모습인가. 이른바 일체법은 인간이 이름으로 거짓으로 만든 것으로서 일체법의 존재실상과는 다르고 따라서 거짓 이름과 실제가 겉도는 현상이 나타나느니라.

산에 피어 있는 꽃은 소녀의 손으로 간다. 소녀는 청년에게로 간다. 청년은 군인이 된다. 군인은 전쟁에서 죽는다. 그리고 무덤에 묻힌다. 그 무덤에 다시 한 송이의 꽃이 핀다. 꽃 소녀 청년 군인 전쟁 죽음 무덤이라는 단어들은 얼마든지 한줄기의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다. 한줄기의 이야기가 아닌 단 하나의 이야기도 될 수가 있다. 사람들은 꽃과 소녀와 청년까지를 하나로 묶어서 자신의 이야기로 만드는 데는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군인과 전쟁과 죽음까지 추가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개념과 언어를 만들고는 전체를 하나로 엮는 내용이 '나'를 중심으로 집착하는 것과 어긋날 때 전체 이야기를 한 묶음으로 들으려고 하기 보다는 꽃이나 소녀라는 하나의 개념과 언어에 매달려서 안주하려고만 한다.

수증이가 구름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고 빗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된다. 수증기 구름 빗물 얼음 물 등은 물의 변화된 모습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이 물의 각 변화단계에 이름을 붙이면 변화단계마다 죽음과 태어남이 생긴다.

구름이 죽어서 비가 되고 빗물이 죽어서 얼음이 된다. 물의 모양이 바뀔 뿐인데 사람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매달림으로써 죽음과 태어남이 생기고 그에 따라 인간의 마음에 아픔이 생긴다. 구름이 물이 된다고 해서 슬퍼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나 내 것 내 애인 내 자식 내 재산 내 명예 내 권력 등의 이름을 붙이고 보면 반드시 괴로움이 생겨난다.

나와 내 것은 임시적인 개념이고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개념과 말을 만들고 그것을 필요한 곳에 붙인다. 자기가 붙인 딱지대로 사물이 있어 주지 않으면 속상해 하고 실패라는 개념과 말을 만들고 거기에 집착하는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다시 의타기성에 대해 설명하신다.

어떤 것이 일체법의 의타기성, 즉 인연상대에 의해서 존재가 생기는 모습인가. 이른바 일체법이 인연으로 생기는 성질이니, 이를테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는 식의 것이니라. 십이인연을 말하면 무명에 의지해서 행동습관의 행이 있고 행에 의해서 분별인식이 있고 등의 양태이니라.

의타기성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의타해서 일어난다는 말이 인연으로 생겨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의타기법은 바로 인연생기법이고 줄이면 인연법이 된다. 우리는 앞에서 인연법에 대해서 공부한 바 있다. 인연법의 기본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써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이다.

주관에 의해 객관이 있고 큰 것에 의해 작은 것이 있다. 행복에 의해 불행이 있고 부자에 의해 빈자가 있다. 일체만법이 상대 것을 모르는 미혹무명이 있으면, 그곳으로부터 업이 있고 분별심이 생기고 연이어 갖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이것이 윤회의 길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여실히 볼 때, 업이 수행으로 변하고 분별심이 지혜로 변한다. 이것이 해탈의 길이다.

그래서 사물의 의타기성 즉 인연법의 성질은 윤회의 길과 열반의 길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사물이 의타인연의 원칙하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집착하면 윤회의 길로 떨어져서 변계소집성으로 추락한다. 인연의 법칙을 알고 그에 의해서 사물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실상을 여실히 보면 원성실성의 해탈길로 올라가게 되다.

인연법의 양면성, 즉 의타기성의 두 방향을 나타내기 위해서 삼성으로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타기성을 말하고 그 예문으로 무명 행 식 등으로 이어지는 십이인연의 예를 든다. 계속해서 부처님은 원성실성을 설명하신다.

어떤 것이 일체법의 원성실성, 즉 사물의 여실한 존재 모습인가. 이른바 일체법의 평등한 진여이니라. 이 진여에는 모든 보살들이 용맹정진으로 인연을 삼는 까닭에 진리와 일치하게 생각하며, 전도된 생각이 없이 사물을 보는 까닭에 지혜가 높아지고 마침내 최고의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느니라.

원성실성은 일체법의 평등한 진여라고 한다. 상대성의 원리를 알아서 사물의 존재를 개념이나 언어로 토막 내어 보지 않고, 한줄기의 당연한 연속으로 이어서 볼 때 사물 전체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꽃 소녀 청년 군인 전쟁 죽음 무덤 등 또다른 꽃이 한 줄기 한 묶음으로 이어지는 지혜의 관찰이다.

구름 비 물 얼음 수증기 등이 한 몸으로 뭉치기도 하고 여러 몸으로 갈라지기도 하는 데에 자유자재하는 깨달음의 지혜가 있다. 의타기성의 양면 가운데 무명의 없어짐으로 업이 없어지고, 업이 없어짐으로써 분별사생심이 멸하는 해탈열반의 길을 의미한다. 사물이 인연의 상태, 무자성의 상태, 공의 상태, 상호포함 상호갖춤의 상태에 있는 것이 확실하게 보이는 것을 뜻한다.
부처님이 변의원 삼성, 즉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의 삼성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선남자야, 눈병이 난 사람의 눈에 눈병의 허물이 생기는 것과 같이 변계소집성은 사물을 잘못 보아서 차별을 만드느니라.  의타기성의 잘못된 면도 눈병난 사람이 잘못 봄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 같느니라.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눈병의 허물을 여의고 맑은 눈의 본성으로 사물을 직시하기 때문에 어지러운 경계가 없으니 원성실성도 그와 같느니라.

부처님은 변의원 삼성을 눈병이 난 상태와 눈병이 없고 맑은 눈을 가진 상태로 나누어 설명하신다. 필자는 한 번도 눈병을 앓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눈병이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 잘 모른다. 부처님 말씀에의하면 눈에 병이 나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눈병난 사람의 허공 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잘못 보는 것을 비유하기 위해서 불교일반에서 자주 인용된다. 병난 눈으로 허공 꽃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면 변계소집성이고 맑은 눈으로 사물의 공한 상태를 보면 원성실성이 된다. 의타기성은 눈 병난 눈과 정상인 눈의 중간에서, 그 두 가지를 분류하는 기준이 인연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사물의 존재에서 인연의 흐름이 보이면 원성실성이고 그렇지 못하고 순간의 사물에 개념과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서 항상함을 얻고자 하면 변계소집성이다.

P535-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