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변하지 않는 성품(능엄경2)

미송 2023. 12. 31. 07:56


허공을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보이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나게 보이지만

실제로 허공이 둥글거나 네모나지 않듯이 참성품도....

 

우리의 현실생활이 파도처럼 움직일 때 아무리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더라도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참마음에 대해서 <능엄경>의 가르침을 들어보자.

우리는 큰스님의 상단법문 자리에 참석할때마다 참마음에 대해서 듣곤 한다. 그런데 그 참마음이 보통의 것이 아니라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까지 묘사될 때 당황하게 된다. 우리는 구름으로 생사를 비유하는 조사스님의 글귀를 다비식을 할 때마다 듣는다.

난다고 하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모이는 것이요.
죽는다고 하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다.
뜬구름 자체에는 실다움이 없으니
생사의 오고감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물건이 항상 스스로 드러나 있으니
그것은 생사를 뛰어넘는 것이다.

여기서 생사를 뛰어넘는 한 물건은 무상 무아 공의 원칙을 벗어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어떤 말씀이나 사상도 공사상과 일치할 수 없으면 그것은 불교적인 사상이 아니다. <능엄경>의 참마음이 큰스님의 상단법문에 나오는 참마음 그리고 위의 글귀에 나오는 생사를 뛰어넘는 한 물건이 공사상과 공존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파 사익 왕이 부처님을  만나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길을 여쭌다. 그러자 부처님은 죽어 본 적도 없는데 왜 죽는 것을 걱정하느냐고 물음으로써 파사익 왕의 마음을 떠본다. 그러자 왕이 대답한다.

부처님이시여, 무상하게 변천하는 몸이 비록 없어져 보지는 않았으나 불이 스러져 재가 되듯이 점점 늙어감을 봅니다. 스무 살 때를 젊었다고 하지마는 열 살보다는 늙었고 서른 살 때는 또 스무 살보다 늙었습니다. 지금은 예순두 살입니다만 십년 전은 훨씬 건강했습니다. 그동안 변하는 것을 우선 십 년씩 잡아 말하였지만 자세하게 생각하오면 어찌 십 년 이십 년 뿐이오리까. 실제로 해마다 늙었으며 또 어찌 해마다 뿐이오리까. 달마다 날마다 달라졌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잠깐이라도 머물러 있지 아니 했사오니 이 몸이 필경에 없어질 줄 아옵니다.

파사익 왕이 정말 진지하게 인생의 무상함을 이야기하자 부처님은 없어지는 몸 가운데 없어지지 않는 성품을 보여주겠다고 하신다. 세 살 때 보던 강이 차이가 없다는 말을 이끌어 낸 부처님은 변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신다.

대왕은 늙었지만 강을 보는 정기는 늙지 않았으니 늙지 않는 것은 변치 아니할 것이며 변하는 것은 없어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오고감이 없을 것이니라. 이 몸은 죽더라도 그 보는 정기는 없어질 것이 아니거늘, 어째서 외도들이 말하는바, 죽은 뒤에는 아주 없어진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까?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아난존자가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보고 듣는 성품이 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저희들에게는 참성품을 잃어버리고 감각기관에게 희롱당한다고 말씀하시나이까?

아난존자의 질문은 보는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변하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족한데 그것이 어떻게 버려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세상의 인연법에 의해서 나타나는 무상한 것들이 모두 참마음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몸 마음 허공 강산 등이 모두 묘하고 밝은 참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아난존자의 머리는 아직도 확연하지 않다. 항상한 참마음이 있고 그 참마음에 의해서 일체만물이 생겨난다는 말은 마음이 백지상태의 자연에 개념과 이름과 가치 등을 붙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참마음이 우리들 각자의 것이라는
점이 이해되지 않는다. 다른 마음은 다 거짓의 것,없어져야 할 것인데 어째서그 참마음은 나에게 항상 있는 나의 것이냐는 의문이다.
  부처님이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대답하신다.

아난아,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나타난 인연이 있느니라. 햇빛은 해의 인연, 어둠은 구름의 인연, 통하는 것은 틈의 인연을 가지고 있느니라. 그러나 이러한 모양을 보는, 이 참마음의 성품은 아무런 인연이 없느니라. 밝고 어두운 것, 통하는 것과 막힌 것은 각기 차별이 있지만 참마음은 차별이 없느니라. 차별이 있는 것은 대상경계이거니와 보는 성품은 차별이 없느니라. 비유하면, 모난 그릇 속에서 모난 허공을 보는 것과 같나니 모난 그릇 속에서 보는 모난 허공은 결정적으로 모난 허공이 아니니라. 똑같은 허공을 둥근 그릇에서는 둥글게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릇이 모나고 둥글지언정 허공은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모든 중생들이 끝없는 옛적부터 저의 본 성품을 잘못 알아서 물건인 양 여기면서 본마음을 잃어버리고 물건의 지배를 받는 탓으로 그 가운데서 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을 보거니와 만일 물건을 지배할 수 있게 되면 여래와 같이 마음이 뚜렷하고 밝아서 바로 이 자리에 시방세계를 다 넣을 수 있을 것이니라.

아난아, 여기서 밥을 지을 때에 손에 돋보기를 들고 햇빛에 비치어 불을 내나니, 이 불이 돋보기에서 나느냐, 쑥에서 생기느냐, 해에서 오느냐. 돋보기는 손에 들렸고 해는 하늘에 떴고 쑥은 땅에서 난 것인데 불은 어디서 온 것이냐? 해와 돋보기는 멀어서 화합할 수 없고 불이 난데없이 저절로 생기지도 아니할 것이니라.

아난아, 여래장 가운데 불의 성품을 가진 참된 공과 공의 성품을 가진 참된 불이 맑고 깨끗하고 본래 그러하여 법계에 가득하여 있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르고 아는바, 그 격에 맞추어서 나타나는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한 곳에 돋보기를 들면 한 곳에 불이 나고 온 법계에서 돋보기를 들면 온 법계에 불이 났느니라. 불은 세상에 가득한 것이니 어찌 나는 곳이 따로 있겠느냐?

부처님은 생멸과 차별이 없는 참마음을 허공과 불에 비유한다. 허공을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보이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나게 보이지만 실제로 허공이 둥글거나 네모나지 않듯이 참 성품이 중생의 그릇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 그대로 있다고 한다. 허공의 비유에서는 참마음이 중생의 미혹 때문에 차별있게 보인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부처님은 또 참마음이 이 세상에 항상 꽉 차 있는 것을 불로 비유한다. 불이 어느 곳으로부터 와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지피기만 하면 불이 나타나므로 불은 보이거나 안보이거나에 상관없이 세상에 항상하고 꽉 차 있다. 참마음의 성품도 불과 마찬가지라고한다. 참마음은 이 세상에 꽉 차 있어서 누구든지 그것을 개발하기만 하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앞에서 아난존자는 참마음이 있는 것까지는 인정했지만 참마음이 바로 내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하는 이 참마음은 누가 특별히 소유하고 안하고를 말할 것이 없다. 불을 피우면 불이 나오듯이, 참성품을 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참성품은 그의 것이다. 참성품은 떨어지거나 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되고 전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부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것이다. 큰 것과 작은 것의 차별을 떠나서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자리에서 모든 세상 참모습의 견본이 된다.

우리는 서두에서 부처님이 말씀하는 참마음에 대해서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떤 생각이 불교적인 것이 되려면 공사상과 일치해야 한다. 공사상은 영원히 변함없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하는 참마음의 내용을 들어보면 어떤 개인적인 나를 내세우는 참마음이 아니라 감각기관에 놀아나서 참마음을 못 보는 나를 버린 다음에야 얻어지는 그런 것이다. 여기서의 참마음은 허공과 같고 불의 성질과 같은, 온 세계에 특정하게 없으면서도 온세계에 항상 꽉 차 있는 그러한 것이다.

개인적인 소아로서의 참나가 아니라 우주적인 대아로서의 참 나이기 때문에 공사상과 상충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공한 가운데 꽉 차 있는 공사상 그 자체이다.

<능엄경>의 서두에서 파사익 왕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길이 무엇이냐를 물었다. 파사익 왕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온 우주에 꽉 차 있는 참성품 항상 내 것인 참성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능엄경>에서 부처님이 답변하는 특이한 점은 인연법이니, 무자성이니, 공사상이니, 이런 것들을 들먹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참마음을 일관성 있게 내세우면서 결과적으로 인연법과 무자성법 공사상을 다 드러내 보였다.

눈이나 귀나 코 등의 감각기관과 그 감각기관의 대상인 형색이나 소리 등에 속지 않고 그것들을 오히려 지배할 때 참마음이 나타난다고 한다. 긴 끈에 달린 추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가 움직일 때 눈동자도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이때에 보는 성품까지도 움직이면 참마음을 등지고 감각기관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보는 성품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그 성품에 의해 살 때 참마음을 찾는 것이 된다. 실에 달린 추에 끄달리지 않기는 쉽다. 그러나 재물과 명예와 색에 끄달리지 않기는 참으로 어렵다.

p63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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