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와 독백

분주하지 말기

미송 2024. 2. 29. 00:25

느림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로 하여금 불필요한 계획에 이리저리 빼앗기지 않고 명예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의 과제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계획한 과제의 종착역에 다소 빨리 도착하고 안하고는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자, 이제 우리 이런 맹세를 해보자. 살짝 스치기만 할 뿐 움켜잡지는 않겠다고. 그러면 사람들은 때로는 빠른 걸음으로 때로는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서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넌지시 우리에게 다 털어놓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전쟁을 겪었다. 그때 나는 '박탈'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심한 장난을 쳤다는 벌로 저녁식사 후의 달콤한 디저트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빵과 우유와 고기를 빼앗기고, 전기와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었다.

마침내 상황이 변하여 독일군이 모두 돌아가고 나자, 한동안 아귀 귀신이 씌우기라도 한 것처럼 먹을 것만 보면 덤벼들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모두가 시네 클럽에 가입하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그때 우리는 원이 없도록 실컷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영화에 대해 제법 비평적인 분석도 서슴지 않았다. 때로 열띤 토론이 과격해지면 마치 전투를 방불케 하는 장면도 연출하곤 했다.

그때 우리는 길다란 바게트 빵을 거의 통째로 삼킬 듯 먹는 버릇이 있었다.  나의 청소년 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촌사람이었던 나는 파리로 올라와 공부를 계속했다. 그때 나는 유명한 이름들을 꿰어 만든 구슬 목걸이처럼 전철역을 하나씩 이어 만든 전철 노선들을 수없이 바꿔가며, 몇 시간씩이나 전철을 타고 파리를 돌아다녔다.

나는 파리의 지도를 펴들고 돌아다니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파리인인 것처럼 태연하게 행세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20개나 되는 파리의 모든 구역들을 한 손바닥 안에,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했다.

나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배웠다. 처음에는 소위 안다고 하는 것이 나의 무지를 줄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곧 내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파리의 그늘진 지대들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파리는 어두워졌다.

나는 도시나 구역의 고유 우표만 보고서 어느 도시 어느 구역인지를 구분하고,  목소리의 억양만으로 그가 누구인지, 그림자만으로 어떤 나무인지를 알아내는 섬세함을 갖게 되었다. 내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은 상대는, 내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던 간에 결국 나를 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내가 과연 어떤 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 살금살금 걷는가?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중단시키지 않으려고 새근거리는 어린아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공원을 떠날 때도 발끝을 세우고 살금살금 떠나는 겸손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떠나갈 때도 살금살금 떠나간다. 그들이 조용히 눈을 내리감는 까닭은 조심성 때문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빤히 뚫어보는 무례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정면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항상 어떤 뻔뻔함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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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경계를 넘는 숫자가 12:02라고 찍혀있다. 몇 분쯤 타이핑을 했을까. 무엇을 얻고 싶어 누르스름한 책을 꺼내어 펼쳤을까. 피에르 쌍소가 프랑스 사람일 거란 짐작. 이름을 발음하며  짐작할 뿐, 책의 앞장이든 뒷장이든 더 열어보긴 싫다. 번역에 별로 맘이 가지 않고, 문맥도 스토리의 연결점도 애매하고 재미가 없다. 그냥 타이핑 순간의 손끝 느낌과 뭐라뭐라 말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도라든가, 그것도 확실치는 않으나 굳이 깊이 따져보고픈 기분도 아니 든다.

낮 동안에 겪었던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어디에 대고 마구 손가락질하고 지적질하고 욕지기라도 뱉어내고 싶었을까 나는 이 똥멍충이 해삼멍게말미잘 무뇌아들아 외치고 싶었을까. 그것을 차분히 내려놓고자 분주해진 마음을 청소하고자 제목만 따라 분주하지 말기란 제목에만 눈을 꽂고 따라 썼을까.

그러나 나는 저 번역된 문장들 밑도끝도 없는 활자의 나열이면서도 한 문장인듯 하는 문장들을 투닥투닥 두드리면서, 마음을 도닥이는 것이었다.

이어서 눈을 감고 눈 먼자의 손을 잡고 걷듯이 타이핑을 이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미쳤는가보다.
아니 피에르 쌍소의 책 속 돈을 위해 맘대로 번역했을 것 같은 번역가의 문장들에 아무 목적도 없이 빠졌나 보다. 투덜대나 보다.

어쩌면 골랐다는 책이 책 속에 한 페이지가 오늘 낮동안에 겪었던 두서없는 말을 입에 담고 사는 이들과 닮았을까. 나는 점점 자폐적 인간이 되어 가는가, 암막이 필요한가.

말과 생각을 단속해야 한다. 그러나 잠간 낮동안의 쓰레기들을 정리하는 방법으로써 말의 난동질을 아니 장난질을 반사해 본 것인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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