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봄꿈

미송 2009. 1. 26. 05:36

 

 

 

        

 

봄꿈 


 

 

가습기!

연두색 벽지로 벽 세칸을 붙이고 나머지 한 쪽 벽은 노란 줄장미 무늬로 포인트를 주었다. 수직으로 일어서 있는 풀밭과 벽을 기어오르는 장미넝쿨의 조화가 한결 따스하게 느껴진다. 이런 벽 위에서라면 겨울바람도 짧게 끝이 날 듯하다. 색에 따라 달라지는 벽의 질감. 사람 마음도 색의 반사에 따라 말랑말랑 해지는 벽(壁)을 닮을 수 있다면.

 

새삼 벽 전체를 쓰다듬어 본다. 고심 끝에 선택한 벽지라서 연정(緣情)이 싹텄나 보다. 책상 옆, 더운 김을 끓여 올리는 가습기의 몸은 보라색. 그러고 보니 연두와 보라가 시야 속에 겹쳐서 들어온다. 찬찬 둘러보면 색깔을 달리하는 소품들이 내 공간 안에 더 있을 것이다. 같은 것보다는 다른 것을 인정하려는 무의식의 발로일까. 나는 점점 보색(補色)관계로 교차된 색에 끌리고 있다.

 

가습기는 연꽃 모양의 뚜껑을 모자인 냥 쓰고 있다. 하루에도 몇 차례 가습기에 손길이 간다. 물이 바닥나진 않았나, 물때가 끼어 구멍이 막히진 않았나, 초록 감지기의 불이 꺼지진 않았나, 수증기를 뿜어내지 못한 채 아예 죽지는 않았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덕분에 내 입술도 촉촉했다. 감기 바이러스가 옮지도 않았다. 기계로 태어나 일견 견고해 보이나 그 수명을 장담할 수 없기로는 인간과 비슷하니, 건조한 방과 마른 입술을 적셔주는 가습기의 공력(功力)이 대견하면서도 안타깝다.      


겨울나무!

내 자취와 목소리를 그가 새새히 기억하듯 나도 나무의 이름, 나무의 신음, 나무의 여린 맥을 짚어보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겨울나무였다. 눈 내리는 들판에서 만났기에 겨울나무라고 불렀다. 그 해 겨울이 올 겨울 보다 더 추웠는지 따스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무가 앓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한 낮에도 우두커니 눈을 뜬 채, 졸고 있는지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지 굶주림을 견디는 중인지 도무지 감지되지 않는 그는, 나무 옷을 입은 사람처럼 신음소리를 냈다. 내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어디 한 번 진맥을 해 볼까 하며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여린 손을 건넸다. 콜록콜록 기침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겨울나무를 굳게 믿어왔다. 아무리 헐벗고 추워보여도 워낙 깊은 땅 속에 뿌리를 묻었을 테니 어지간한 비바람이 불어쳐도 끄덕 안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3년 전에 만난 겨울나무는 안 그랬다. 넓은 들판에 내리는 눈을 혼자 다 맞고 섰던 겨울나무. 그는 한 자리에 꼿꼿이 서서 죽어가는 듯 보였다. 뿌리 때문에, 뿌리에 붙은 잔뿌리들 때문에, 홀연 하늘을 비행하는 새처럼 날 수도 없었다.

 

그대로 죽으면 겨울나무는 무엇이 되어 태어나지, 나는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꼭꼭 박혀 거리에 나오지 않았고 나무들만 눈 덮인 거리에 서 있었으므로. 그 때 집으로 들어오려다 뒷덜미를 잡아끄는 안타까움에 겨울나무 곁에서 내내 서성거렸다. 그해 겨울, 물 위를 떠돌던 철새들이 다 잠든 새벽까지 겨울나무의 신음소리는 이어졌고, 골목길 달빛마저 오한하였다.


때때로!

때때로 잊는다. 그가 얼마나 아팠던가를/ 때때로 잊는다. 세상천지가 초록으로 변하기 전 암갈색 뿌리의 신음소리를, 그리고 겨울나무가 되기 전 그가 창공을 누비던 새였던 것을/ 때때로 잊는다. 겨울에 만나 겨울나무라 불렀으니 여름에 만나면 여름나무라 불러야지 하며, 한 뿌리가 체득한 지난한 생명의 역사를/ 외꽃 잎에 물방울을 튕기며 오래전 자취와 목소리를 기억하는 겨울나무가 웃는다. 그가 봄 나무가 되어 웃고 있을 때 나는 다시 잊는다. 그해 겨울 나의 부대낌일랑, 

 

기억은 한시적이라 피었다 사라지는 수증기 같다. 건조할까봐 연신 김을 쌕쌕 내뿜는 겨울 동지(同志) 곁에서 나는 잠시 그해 겨울나무를 떠 올렸다. 미세한 입김 속에 커다란 양각(揚角)으로 새겨지는 나의 겨울나무. 그해 겨울의 기억이 내 방 가득 초록과 보라의 숨결로 춤추고, 어우러짐은 시간과 계절로 이어진다. 겨울나무의 뿌리가 죽음 같은 기다림을 맛본 후 마른 가지에 싹을 틔우듯, 투명한 물방울이 보이지 않는 수맥처럼 연결되어 연둣빛 봄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우리는 계절을 잊는다. 다시 희망을 꺼내고, 가습기의 숨결과 촉촉해진 입술과, 그 해 겨울나무의 신음을 노래한다. 그 순간 부스럭 부스럭 고엽 아래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봄꿈.  

 

2009. 1. 26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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