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Y에게

미송 2009. 1. 18. 21:07

 

Y에게 

 -윤수를 생각하며

 

널 부르는 이 순간 어디서부터 우리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 좀 아득해지네……. 우선은 안부를 물어야겠지. 그동안 잘 지냈니? 최근에 네 소식을 들었단다. 병원에서 퇴원해 공부방으로 돌아왔다고 그 곳에 계신 선생님께서 전해주셨어. 살도 포실포실 오르고 얼굴빛도 환해졌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더구나. 네가 천방지축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사고가 나서 40일 이상이나 병원신세를 지고 있었다는 소식은 몹시 우울했단다.

 

너를 처음 만나기 전, 그 전달에 나는 아동센터를 연 친구를 도우러 갔다가 지영이라는 9살 된 계집아이를 만났지. 그 때 지영이는 밤마다의 꿈 이야기를 해 주더구나. 곰과 여우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서 싸우는데 무서운 곰에게 쫓겨 다니던 여우가 나중에는 뾰족한 포크를 가지고 곰의 귓구멍, 눈구멍, 똥구멍을 콕콕 쑤셔서 기어이 이겨 버린다는 내용이었어. 어른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좀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단다. 뭐냐 하면, 그 꿈 이야기는 지영이 자신이 무서워하는 그 무엇이 늘 곁에 있다는 뜻이고, 지영이가 그 두려움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말이란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나는 지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말했어. 그리고 내일 밤에 꾸고 싶은 예쁜 꿈도 함께 쓰라고 말이야. 그러면 예쁜 꿈만 꾸게 되겠지?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차창 밖으로 줄지어 선 하얀 줄기의 자작나무를 보았지. 그 때, 내가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 있었어... ‘벌거숭이로 달려 나올 아이 하나 키우고 싶다.’ 이미 나는 튼튼하고 건강한 두 아들을 다 키워냈지만 말이야.

 

따뜻한 봄 3월에 너를 만났지. 너는 근육이 잘 자라지 않는 병이 있어서 한 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처음 내게로 달려왔어. 어깨에 짊어진 가방이 유난히 무거워 보여서 내가 얼른 그것부터 내려놔 주곤 했는데, 너는 그때 나를 슬쩍 외면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우더라. 그것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을 때 네가 반갑다고 상대방에게 건네는 너만의 특유한 인사법이잖아. 이른 봄 추운 날에도 양말은 거의 안 신고 다녔고 어떤 날에는 바짓가랑이가 흙투성이가 되었다고 여자애들 앞에서 바지를 훌렁훌렁 벗어던지곤 했어. 야윈 종아리와 그곳 군데군데 남아있는 상처자국들.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오는, 아빠의 손이 미처 닿지 못한 네 몸의 얼룩진 때 자국을 보았을 땐, 난감하더구나.

 

마당 한 가운데 뽐뿌물을 길어 올려 너의 발등을 씻어줄 때, 네가 간지럽다고 깔깔대며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할 때, 나는 수돗가에 피는 아기별꽃에게 간지럼을 먹이고 있는 느낌이었어. 그 때 네 옆모습이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아니. 너는 늘 그렇게 얄밉고 짓궂고 나를 화나게 하는 장난만 치다가도, 가끔 이렇게 선생님인 나를 감동시키잖니. 언젠가 저녁 8시에 수업이 끝나서 나는 내 집 방향으로 돌려놓은 차머리에 올랐지. 그 때 쪼르르 달려와 걸어서 10분 거리인 너의 아파트까지 태워달라고 했을 때 방향을 바꾸어야 했지만 태워줄 수밖에 없었어. 그 다음날 너는 묻지도 않는 말을 연신 지절대더구나. 나도 엄마가 있어요, 엄마가 있어요, 하고 말이야. 그리곤 너의 엄마도 아닌 주방에서 일하는 선생님께 달려가서 엄마, 엄마 하더구나. 나는 속으로 눈치 챘단다. 멀리 떠나간 엄마가 그리운 거지? 자식, 그러면서도 왜 나한테는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들지 않고, 허구한 날 울고 떼쓰고 소리 지르고 큰 형아들한테 대들고 하니? 그러나 너무 미안해하지 마. 나는 네 숨겨진 마음을 다 알고 있어.

 

공부방에 오자마자 일터에 계신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며 습관처럼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하던 네가 오늘 더 보고 싶은 건 왜일까. 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는데 한 달 밖에 머물지 못하고 그 곳을 떠나온 게 아직도 미안하구나. 내가 떠나온 후 너도 다른 공부방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 이후 교통사고까지 당해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4월. 선생님은 옮겨온 공부방에서 현주라는 아이를 만났어. 어느 날 공부를 하다가 그 아이가 숨죽여 훌쩍거리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지.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품에 기대며 그동안의 불만사항들을 털어놓았어. 울음은 좀체 그치지 않았어. 그 이후 경험으로 알았지만 그 아인 한 번 울기 시작하면 30분 이상을 그렇게 울곤 했던 거야.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했어. 아이가 우는 이유를 다 듣고 난 후 안타까운 마음에 우리 집에 가서 하룻밤 같이 잘까? 나랑 꼭 껴안고 잘래? 하고 물었더니 화색이 돌며 좋아라 하더구나. 그 아이는 다섯 살 때 엄마가 아빠와 헤어지는 바람에 엄마의 품이 그리웠던 거야. 보통 때는 엄마가 그립지도 보고 싶지도 생각나지도 않는다고 완강하게 말하지만, 그것이 다 거짓말인 줄 나는 알거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온갖 것의 어머니”라는 어렵고도 멋진 말이 있더구나. 네 앞에 있는 선생님 그리고 모든 어른들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성큼 다가설 수 있도록 앞으로 우리 모두 노력하자꾸나. 나는 매일 바닷길을 지나 출근을 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본단다. 동심에 의해서, 즉 너희들에 의해서 깨끗해지는 어른들을 꿈꾸면서 말이지. 바다는 오늘도 빨래를 하는지 철썩철썩 엉덩이를 때리며 웃고 있구나. 올해 나는 너희들을 만나서 바로 너처럼 많이 행복하고 많이 배우고 많이 자랐단다. 늘 고마워하고 있어. 그러니 너희들은 바다가 어른들에게 가져다 준 선물이 분명한 거야.

 

2008. 12.14 오정자

 

 

'채란 문학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봄꿈   (0) 2009.01.26
[수필] 별의 소식  (0) 2009.01.24
[시] 신선한 거짓말   (0) 2009.01.18
[시] 허리를 칭칭 감은 줄기가   (0) 2009.01.16
[소설] 하얀 그림자의 독백  (0) 2009.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