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토요 만담(漫談)

미송 2009. 2. 7. 18:11

 

 

 

토요 만담(漫談)

 

 

토,

  토끼풀을 뜯으러 아카시아 등꽃이 어우러진 오월 산을 누비며 아버지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물기 묻은 풀을 먹으면 토끼가 즉사할 수도 있다는 새끼토끼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 무척이나 다정했고 신기했고. 하교 후 책가방 풀어놓은 딸의 어깨를 ‘내 토끼’ 하면서 쓰다듬는 손길이 좋아 토끼풀 뜯는 일은 의당 나의 과제가 된 것이다. 하긴 그 때 70년대 초 유신정권이 막 들어섰을 때 삼엄한 거리에서 말조심해야 한다고 이르던 군인 아버지의 당부도 지금은 희한하게 들리지만 그 땐 엄격한 사실이었다. 그 시대 학교 숙제라는 게 뭐 대수였나 싶었던 건 구구단 외우기 아니면 부모님 이름쓰기 정도, 그것도 몇 번씩 되풀이해 써야했으니 무스그 훈련 같았다.

 

  토끼풀을 뜯을 때 마른 것을 뜯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의 아둔한 암기력을 졸지에 향상시켰다. 그러나 다시 아둔해지기 시작하는 요즘 내 기억력을 따져볼 때 그 당시의 누구에게 감사를 돌려야할지. 윗사람에게 좀 미안한 행위였다. 네 살터울인 오빠보다 구구단을 먼저 외운 것이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데 한몫 했다는 기억을 떠올리자면 새삼 오라버니에게 미안할 이유일지. 암기력을 키운다기 보다는 무엇보다도 토끼풀을 뜯을 때, 토끼만큼은 나도 좋아하였기에 토끼의 죽음은 얼토당토안한 일이라는 사명감이 생겨났던 것이니 순진하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귀여움을 노리거나 라이벌 의식을 키우겠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기억도 확실치는 않다.

 

  토끼를 좋아했고 토끼도 사람처럼 먹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에 본능적 끌림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오랜 시간 자리 잡았던 것을 오른쪽손가락이 입때껏 입력하고 있는 것이니 토, 할 때 토끼하면 나는 물기 없는 생계물에 집착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기 없는 생계물이란 게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일까 자신에게 다시 묻는다. 물기의 반대로 눈물 흘리며 먹어 본 빵맛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땀 별로 안 흘리고 돈 벌어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같은 취업대란 시절에 타당한 바램인지, 아니다, 그냥 ‘물기’ 하면 나는 토끼는 물기 없는 풀을 줘야한다는 아버지의 당부가 생각났을 뿐이다.

 

  토끼가 눈물도 콧물도 없는 동물인지는 모르겠다. 노란 소변으로 앉았던 자리를 물들여 논 것을 본 기억은 있다. 아, 토끼 하니까 똥. 떼굴떼굴 콩자반과 흡사한 까만 똥을 정부미 쌀 위에 콕콕 박아볼까 하는 충동도 일었다. 도시락 (예전 방언으로는 변또- 변또하니까 문득 이 도령과 춘향이 사이에서 사까닥질하던 변사또가 떠오르는 건 무슨 연상활동? -) 검사가 있는 날이면 건성건성 보리나 콩을 섞어주지 않은 엄마가 야속했다. 선생님의 회초리 같은 눈길을 피할 길이 없어 허둥지둥 댔다. 어린 가슴에 치욕 같았다. 도시락을 쌀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싸 주는 대로 먹는 처지에 선생님의 질책은 멍장구지는 일이었다. 사랑의 매가 넘쳐났던 시절에 사랑이라는 말은 교회 안팎으로 홍수가 났다.

 

  방과 후 나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막걸리 받아오는 일 보다 아카시아 잎 와스스 훑어 토끼장 속에 솔솔 넣어주다 아상아상 갉아먹는 새끼토끼를 날름 품어대는 일이 더 즐거웠다. 내 진통으로 낳은 새끼처럼 토끼장의 토끼를 꺼내어 바짝 안을 때면 얕은 햇살을 한 움큼 잡는 기분이었다. 36년 전 ‘토’ 에 대한 기억이다.

 

 

토,

  토악질 해 대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라고 4년 전 내가 문단에 등단을 했을 때 누군가가 귀띔해 주었다. 속엣 것들을 마구 토해내라고 비행기를 태우기도 하고 등도 떠밀었다.

 

뭘 잘못 먹었기에 토를 할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아침저녁으로 점점 얼굴보기 힘들어진 첫째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나는 반성했다. 소화 못시키는 일이 이 아이에게도 점점 늘어가는구나 생각하며 살살 아이의 등을 두들겼다. 엄마 나 오늘은 ‘토’ 안했어 하고 학교울타리 밖으로 뽀얀 메시지가 날아올 때면 한시름 놓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빨랫감이며 책들을 정리하다가,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해 울컥해지면 미친 듯 시인의 토악질이 하고 싶었다. 초라함도 불사한, 괙괙거리는 나는 오리였다.

 

  누구의 채증(滯症)을 받아내는 고역(苦域)의 길이기에 길 길, 낄낄거리다가도 우아하게 입막음을 하였다. 입막음하는 손이 36년 전 풀꽃반지 끼었던 오른쪽 장지 손가락인지 약지 손가락인지 순진한 내 손가락인지 몰랐다. 그렇게 토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했을 때의 나, 솔직히 시인이라는 명함을 부끄러워했다. 이런 고백을 믿어줄지 아는 척 마는 척 흥청흥청 술이나 마시자 할지, 아무렴 반응이야 몰라도 괜찮다. 토악질이라는 것이 본디 밑바닥 쓸개즙보다 더 쓰고 푸르뎅뎅하다는 것, 끝없는 물기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누가 대신 내 안에 것을 토해준 들 그 토사물(吐瀉物)들이 내 것이 아닐진대 언제까지 내 안에 있는 것은 필시 내가 토해내야 한다는 사실과 투쟁하는 것이다. 스타카토의 시 보다 더 압축적인 토사가 내 안에 있음을 느끼기에 자기계시의 벽을 긁어내어 구멍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 이응 자 하나가 중요한 구멍이며 통로다. 토, 에다 플러스 이응 받침 하나면 통(通)이 되는데. 제 몸 여기저기 못 자국을 내고 애먼 망치질을 하고 그것이 제 상처인지 타인의 비웃음인지도 불감인 채 훈육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공해처럼 부유한다. 막힘과 뚫림의 경지 혹 경계조차 인식할 능력을 잃었나 보다. ‘오호통재(嗚呼痛哉)’ 라 할 때의 ‘통(痛)’ 이 없어 환한 구멍들이 막혀버렸다. 거짓 기쁨들은 꼭 삼삼오오 허한 짝을 이루며 춤을 추고 당당한 물기만 동그마니 미소하며 앉았다.

 

 

토,

  ‘이거 무슨 거지 소굴같애......’ 하며 엉거주춤 어깨를 수그려 숯가마 토굴로 들어간다. 면으로 된 긴팔 옷을 위아래로 걸친 아줌마들이 머리에다 수건을 쓰고 “아 시원해, 이 온도가 딱이야.” 하며 들쑥날쑥한 엉덩이를 비집고 앉아 있다. 토굴이 좁은 느낌이다. 저온 방은 숯을 뺀지 열흘이나 지나 식은 죽 같이 멀건한 분위기고, 고온 방은 겁이 나 아예 근처도 안 갔다. 전라도 해남에서 올라온 무리들이 ‘오메 좋은 것’ 하며 철퍽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먼 데 손님을 맞는 이처럼 강원도 아즈메들 한 판 숯가마의 약효에 대해 떠든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면티와 면바지 면타월을 걸치고 온 두건을 토끼 꽁지모양으로 맨 귀여운 40대 후반 여인네가 돌아가며 우스운 얘기라도 하자고 제안을 부친다. 전라도 아즈메 “오메 고거이 좋은 생각...” 이라며 모질게 전라도 사투리를 쏟아낸다. 따끈한 진풍경에 내 귀도 쫑긋한다.

 

  두건을 토끼 꽁지모양으로 맨 여인이 내 얘기는 잘 들어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강조를 하며 새삼 주의집중을 시킨 후,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어느 부동산업자가 있었는데 그 부동산을 하는 남자가 하루는 바람을 피우려고 자기보다 20년이나 젊은 여자를 꼬드겨서 만나기로 했단다. 둘은 날 잡아 모텔로 골인하게 되었다. 모텔 문을 열기전 젊은 여자가 손가락을 내밀며 30만원을 몸값으로 줄 것을 약속하라고 했다. 알았다고 약속한다고 하고선 그 부동산업자는 젊은 여자와 즐거운 시간을 오랫동안 가진 후 약속대로 봉투를 건네고서 헤어졌다. 젊은 여자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화장실로 가서 들뜬 마음에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런데 수표는 세 장이 아니라 두 장뿐이었다. 여자는 ‘이런 사기꾼 같으니’ 하며 바로 전화를 걸어 그 부동산 업자에게 따질 듯 물었다. 왜 약속을 안 지켰냐고. 그러자 그 남자 하시는 말씀 “아니 내가 달리 두 장만 넣었겠소, 흠, 마당에 들어가 보니 풀도 별로 없고 수돗물을 틀어보니 물도 제대로 나오질 않으니 어찌 약속을 지킬 수 있소.” 했더란다.

 

  “왜 내가 이런 유머를 하며는, 어머나 어떻게 그런 야시한 유머를 할 수 있어요 하는 여자들이 꼭 있는데 말이지…….” 그러자 맞은편에 앉았던 서너 명 여자들이 동시에 ‘어머 그건 순 호박씨다, 뭘.’ 하며 맞장구를 친다. 숯가마 토굴 속은 순식간에 40- 50대 여자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해진다. 문턱 하나 사이로 펼쳐놓은 돗자리에 누웠던 50대 아저씨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시는지 슬그머니 사라진다. 깔깔깔 웃으니까 물지게 한 짐 졌다 놓은 것 같이 뭉근했던 어깨가 가뿐해진다. 원주에 숯장수가 많고 숯찜질방이 유명하다는 정보를 이사한 지 꼭 일주일 만에 얻었다. 후줄근하지 않은 여자들의 유머가 재밌을 연령이기도 하지만 내숭의 물기에 권태가 나기도 했었나 보다. 이내 나는 이사후유증으로부터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내 안에 물기들이 뜨거운 숯 속으로 전부 빨려들어 간 듯하다. 원주에 짐을 풀고서 맞는 첫 토요일, 베란다의 빨래들도 젖은 물기를 말리고 있다.

 

2009. 2. 7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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