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란의 빛 / 박형준
최근의 한국시에서 고독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대체적으로 착한 시만이 대접받는 풍토가 된 것 같다. 생활과 자연에 기반한 시들이 삶에 대한 진정성이 넘치는 시로 포장되어 평단과 독자들에게 유통되는 현상은 최근 몇년 사이에 더 강력해진 것 같다. 때아닌 '남루'와 '느림'과 근검한 '생활'. 시인이라고 해서 꼭 의식적으로 거지와 성자 사이에 있어야 되는 걸까.
그런데 현실은, 수백권이 꽂힌 교보문고 문예잡지 코너에서 아무 문예지나 한 권 펼쳐들면, "아, 이 시인이 이렇게 어렵게 사는구나, 아니면 상처받은 내면을 복구하러 여기로 여행을 떠났구나" 하면서 별 관심도 없는 최근 동정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대적으로 주목을 못받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난해한 시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환각과 꿈으로 덧칠된 이해하지 못할 내면의 잔혹성이 도드라지는 젊은 '산문파 시인들'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연파 시인들이 이젠 자연과 생활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지극해져 별장을 만들거나 농촌으로, 산중으로, 심지어는 절에까지 내려가 살든, 환각을 노래하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이 현대도시의 미로 같은 복잡미묘한 내면을 행갈이나 연갈이도 없이 기나긴 산문으로 써내려가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다만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왜 한국시에서 고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인가'이다. 그런다고 내가 여기서 한국시의 강박코드 중 하나인 김수영의 '노고지리'와 '혁명'과 '고독'을 새삼 꺼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자의식도 자기반성도 찾아볼 수 없는
요즘 시에 고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들 내면의 상처를 꿈과 여행을 통해 해결하려 들며 시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자의식도 자기반성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시만 뒤떨어져 있다는 자괴감에서 꺼낸 말이 아니다. 우선 나부터가 세상에 한참 뒤떨어져 있으며 기억의 흐린 후광에 사로잡힌 낡고 칙칙한 시를 쓴다. 이미 암스트롱(N. A. Armstrong)이 밟아버린, 과학의 탐사지로 전락한 달을 보면서도, 여전히 마른 포도덩굴이 뻗어 있는 담벼락의 초생달에서 고양이 눈을 떠올리고 고향을 생각한다. 끊임없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치유되지 못할 상실감(정확히는 도시에 안착하고 싶은 욕망!)을 핑계삼아 '늙은달'을 예찬한다. 자연은 유년시절의 끝무렵 도시로 올라오면서 내 곁에서 거의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데, 여전히 젖 한줄기 흘러나오지 못하는 자연을 빨아대는 퇴행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나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현실(여기서 현실이란 생활과 자연만을 지칭하지 않는다)과 유리된 채 인문학과 인터넷 등에만 기대어 있는, 자기 체험이 부족한 시들도 고독이 없긴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시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것에 대한 지나친 강박으로 부자연스럽고 오히려 너무 진지하기까지 하다. 시는 세계라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에만 있지 않다. 세계는 발견되기 위해서, 그 안에 설레임을 가득 품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새로움은 무엇을 해석해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숨기고 있는 설레임을 건드렸을 때 그 끌어당기는 힘과 맞서는 데서 생긴다. 그런데 말장난 같긴 하지만 고독이 없는 설레임이 있는가.
죽음의 대화
『내셔널지오그래피』(National Geography) 같은 잡지를 들여다보면 먹이를 사냥하는 맹수들의 역동적인 사진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직접 본 적이 없어 단정할 순 없지만, 야생의 짐승들은 눈이 고독하다. 그들의 고독은 생태계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있는 맹수들일수록 더 강렬하고 진하다. 『내셔널지오그래피』한국판 5월호였다. 하루 종일 늑대들에게 쫒겨다닌 어린 수컷 무스(moose, 말코손바닥사슴)가 분홍바늘꽃 덤불 속에 기력이 다해 쓰러져 있는 사진을 보았다. 늑대새라고 불리는 도래까마귀가 포식자들이 먹잇감을 죽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재빨리 시체 위에 내려앉아 살점을 쪼아먹으려고 무스의 코 앞에서 충혈된 눈을 바라보고 있다. 하루 종일 늑대들에게 쫒겨다니며 반복해서 차디찬 강물에 내몰려 진이 빠진 무스는 드러난 갈비뼈가 얕은 숨을 따라 오르내리고 눈은 퀭하기 그지없다. 늦은 오후가 되어 강둑에 올라온 무스를 향해 늑대가 다가오고 배리 로페즈(Barry Lopez)라는 외국 작가가 '죽음의 대화'라고 일컬었던 대로 그들은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응시하고 있다. 외국 작가는 그 광경을 이렇게 썼다. "이런 시선교환은 의식(儀式)과 같다. 사냥한 동물의 살을 취하고 대신 그 영혼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이만한 의식은 못되더라도, 시인이 사물에서 시를 취하려면 적어도 사물의 영혼이 경이롭다는 것은 알아야 할 것이다. 한국시에서 고독이 점차 사라지는 이유는 자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서 자연과 생활, 무의식에 습관적으로 자신을 의탁하여 생태시니 뭐니 하는 자기 삶의 알리바이를 그럴 듯하게 위조해내기 때문은 아닐까. 자기 내면의 나르씨스적 거울이 자연과 생활이고, 아니면 번지수 없는 암흑의 환각이라면, 시인이 마주선 채 응시하고 있는 사물이란 이미 자기 시를 쓰기 위한 단순한 먹잇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럴 때 사물과 마주 선 고독에서 나오는 저 '죽음의 대화'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경의와 설레임도 자기 삶을 위한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게이머(gamer)의 화려한 손놀림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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