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에서 유식으로
제 1 강 유심
산이 있는 곳에는 절이 있다.
물론 아무 산의 아무 곳에나 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산, 혹은 볼품없는 산일지라도 숲과 계곡과 바위와 물등이 그 자체로 번뇌를 씻어 줄 듯 안온하고 차분한 풍광을 이루는 곳에는 거의 예외 없이 절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옳다.
"절이 있는 산은 좋은 산이고, 절이 있는 곳은 그 산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다."
여기서 좋다는 것은 아름다운 풍광으로 보기에 좋음은 말할 것도 없고. 불현듯 거기에 그냥 눌러앉아 살고 싶을 정도로 세속에 찌든 때를 씻기에 좋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을 찾는다. 아니 절이 있는 곳을 즐겨 찾는다. 단지 돈독한 불심으로 절을 찾는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청정한 환경을 닮아 가는 듯한 잠시의 청량감을 맛보고 싶어 절이 있는 곳을 사람들은 더 선호한다.
요즘처럼 갈수록 환경 문제가 심각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입을 모아 자연 보호 또는 환경 정화를 부르짖으면서 꿈꾸는 이상은 산사의 환경과 같은 터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절박하고 간절한 외침에 비해 자연 환경의 복원 속도는 너무 더디기만 하여 예견되는 지구의 종말은 피할 수 없을 듯하다.
물질적 편리를 먼저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을 생각하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환경 훼손으로 인한 지구의 종말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환경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간과해 온 점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 이원론의 공과
우리는 청정한 환경이 우리의 마음을 더불어 청정하게 해 준다는 점만 앞세워 왔을 뿐, 우리의 청정한 마음이 주변 환경을 아울러 청정하게 해 줄 것이라는 점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주장이 있더라도 그것은 철학자의 비현실적인 이상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다.
예를 들어, "중생이 청정하면 국토도 청정하다"는 불교의 명언을 하나의 원론으로 수긍하면서도 <유마경>에서 "만일 보살의 정토를 얻고자 한다면 바로 그 마음을 정화해야 한다. 그 마음의 정화에 따라 국토도 맑아진다"고 제시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종교에서나 하는 말이고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무시해 버린다. 그 방도는 과학적인 현실이 아니라 종교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신봉하는 과학이 도대체 어떠한 과학인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자. 과거의 신을 대신하여 맹목적 신봉의 대상이 되어 버린 근대 이후의 과학, 자비의 신이어야 할 그 과학이 우리를 파괴와 종말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이 같은 과학의 발동은 근대 서양 사유의 골조를 설정한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물질의 세계로부터 생기를 박탈하고, 그 세계를 인간의 정신과는 전혀 교섭이 없는 무기물로 분리시킨 데서 비롯된다.
소위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의하면 물체는 스스로 작용하지 못하고 오직 외부의 힘, 즉 신의 힘으로 운동하는 비정하고 투명한 존재일 뿐이다. 이로부터 자연계의 물질을 객관적이고 무기적인 실체로 탐구하는 자연 과학이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이 과학은 결국 오늘날처럼 자연의 활용으로 삶의 편리를 구가하는 물질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자연계의 물체와 인간의 마음을 분리하지 않고서 그 물체를 스스로 움직이며 살아가는 유기적인 존재로 생각했던 고대에는 적어도 현대와 같은 심각한 환경 문제는 없었다. 옛날 사람들은 마음을 맑게 하여 물체를 주시하면 그만큼 물체의 본성을 느낄 수 있었다. 물질 자체가 그 깊은 혼을 이야기하고, 마음은 그 시를 음미하여 이해한다.
물질과 마음은 깊이에서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깊이는 무한하게 깊어져 가는 것이다. 이처럼 물질과 마음의 유기적인 관계가 17세기에 이르러, 데카르트(1596~1650) 같은 철학자가 정신과 물질을 서로 독립된 실체로 분리하는 이원론을 주창하면서부터 단절되어 갔다.
서구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우리는 정신이 물질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물질이 정신의 소산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비과학적이라고 일축하면서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흥밋거리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서구에서도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이내 후대의 철인들에게 의구심이나 초극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물질 존재의 독립성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탐구하고 신봉한다면, 뭔가를 보고 뭔가를 듣고 있다는 정신적 기능을 통해 물질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이 엄연한 사실 역시 인정하고 탐구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일 것이다.
- 이원론의 전복과 유심
과학이 아니라 서구의 철학적 전통이 더 믿을 만하다면 우주는 허망이고, 단지 이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는 <화엄경> 십지품의 정언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어 있는 것이다"는 버클리의 정언으로 입증될 것이다. 버클리(1685~1753)는 모든 대상이나 사물이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제까지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버렸다. 물질이 따로 있고 나서 그 물질을 감각이 형상으로 인식한다는 상식을 뒤집고, 그는 오히려 우리의 감각에 그려져 있는 물질이 인식될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버클리는 '마음의 철학자'로 불린다.
마음의 철학으로 말하면 일찍이 불교에 버금할 만한 사조가 없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마음의 철학을 불교 용어로는 유심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을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유심이다.
불교에서 유심의 전통은 그 뿌리가 깊다. 경전의 설법에서 마음이 차지하는 비중은 클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넓고 깊다. 예를 들어, <잡아함경>에서는 "마음이 괴로우면 중생이 괴롭고, 마음이 깨끗하므로 중생이 깨끗하다"고 설한다. 이후의 교리 연구에서는 마음을 매우 상세하게 분석해 냈다. 대승 경전의 예로는 "우주는 오로지 나의 이 마음이라고 관찰하여 '나'와 '나의 것'을 떠나면, 동작도 없고 오고 감도 없다"고 설하는 <능가경>을 들 수 있다. 예를 더 들자면 한이 없지만, 소위 유심게(唯心偈)라고 알려진 <화엄경>의 다음과 같은 설법을 통해 유심의 진면목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처럼 갖가지 복합체를 그린다. 모든 세계 중에서 마음의 특질을 이루는 요소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마음처럼 부처도 역시 그러하고, 부처처럼 중생도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은 차별이 없다."
이에 의하면, 마음은 온갖 존재를 모두 갖춘 것이므로 어리석음에 빠진 마음으로는 중생이 되고, 깨달은 마음으로는 부처가 된다. 결국 마음 이외에는 부처도 중생도 없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이와 같은 유심을 주장하는 관점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다.
모든 세계에서 생명체가 윤회 전생하는 모습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윤회 전생하는 마음은 탐욕에서 생긴 어리석은 마음이다. 그러므로 탐욕으로 인한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기만 한다면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유심론은 버클리가 주창한 마음철학의 한계를 초월한다. 버클리 역시 백지 상태와 같은 마음에 그린 온갖 그림이 외계의 물질세계라고 생각했지만, 그 마음의 자율성은 인정할 수 없었다. 마음을 주도하는 또 다른 정신적 실체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정신적 실체로 신을 내세웠다. 따라서 버클리의 마음철학은 신을 근저로 하는 유심론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그는 이를 통해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 주 객 이원론을 일찍이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서양 철학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러나 불교의 유심론에도 아직 과학이라고 평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진정한 과학이라면 객관과 주관, 즉 인간 외부의 물질세계와 마음이라는 정신세계의 양면을 대등하게 탐구하여 그 관계를 정립해야 하지만, 불교의 유심론은 주관에 치우쳐 있다. 즉 유심은 물질과 마음이라는 둘로 나뉜 그 한쪽의 마음으로만 모든 것을 돌리려고 하는 사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마음의 소산이라는 주장은 여전히 의구심을 낳는다. 그 유심으로부터 진전한 유식(唯識)에 이르러서야 그 같은 의구심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심론은 물질주의가 자초한 문명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바람직한 삶의 방도를 제시한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마음은 청정하지 않은 상태로 있으면서 환경만 청정해지길 기대하기 어렵고, 마음이 탐욕으로 물들어 산란한 상태에서는 결코 진정한 행복이나 평안을 기대할 수 없다. 이 점은 철학적 종교적 이론에 앞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진실이다. 물질주의가 팽배하면 할수록 유심론은 새삼스럽게 그 진가를 발할 것이다.
제 2강 상식과 유식
-심에서 식으로
어떤 사람이 물가에 갔더니 물속에 금덩이가 보였다. 그는 물속에 들어가 그 금덩이를 찾으려 애를 썼다. 진흙 바닥을 헤치며 더듬어도 금덩이를 찾을 수 없었다. 별수 없이 물 밖으로 나왔는데, 흐려진 물이 맑아지자 또 금덩이가 보였다. 다시 물속에 뛰어들어 찾았으나 역시 찾지 못했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자 그는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이때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 나왔다가 아들의 그런 꼴을 보았다.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아버지는 물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그것은 뒤편의 나무 위에 있는 금덩이가 물에 비친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나무 위의 금덩이를 찾아서 집으로 가지고 갔다.
이 이야기는 <백유경> 이라는 경전에서, 어리석은 범부들이 이 육신 속에 자아가 있는 줄 알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일부는 마음이 빚어내는 세계를 설명하는 데도 원용할 만하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바깥세상의 모든 대상들이 사실은 마음이라는 수면 위에 비추어진 실체 없는 영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물속에 실제로 있는 금덩이인 양 붙잡으려 부질없이 애쓰면서 지쳐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그 진상을 알기 전까지는 소모적인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그 이야기의 후반부는 유심을 비유하고자 할 경우에는 달라져야 한다. 정작 마음을 찾고자 하면 마음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는 <수능엄경>에서 부처님과 아난다가 주고받은 대화의 요점을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은 여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서 기뻐하여 도를 구하려고 발심했다는 아난다에게, 무엇으로 보았으며 무엇이 기뻐했느냐고 묻는다. 아난다는 자기의 눈으로 보았고 자기의 마음으로 기뻐했다고 답한다. 이에 부처님은 눈과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눈이 얼굴에 있다는 대답은 시빗거리가 되지 않지만, 인식하는 마음이 몸속에 있다는 대답은 계속 추궁을 받는다. 마음이 몸속에 있다면 몸속의 것들은 분명히 알아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부처님의 지적에, 아난다는 마음이 몸 밖에 있겠다고 답한다. 그렇다면 마음이 아는 것을 몸은 알지 못하고 몸이 아는 것을 마음은 알지 못해야 할 것이라고 부처님이 지적하자, 아난다는 마음이 눈 속에 있을 것이라고 답한다.
여기에 이른 아난다의 답변은 우선 상식적으로는 그럴듯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어도 우리는 어떤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눈 속에 있다는 아난다의 답변은 역시 타당하지 않다. 이후 아난다는 대상과 합하는 곳에, 또 이보다 더욱 모호하게 마음이 중간에 있다고 답하다가, 급기야 마음은 집착함이 없는 것이므로 아무 데도 없다고 답한다. 물론 부처님은 그 대답이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마음이 있기는 하되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원론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후 계속 진행되는 대화의 잠정적인 결론은 대상을 비출 뿐인 눈의 기능을 마음이라고는 말할 수 없고, 실제로 보고서 인식하는 것이 마음이라는 데에 이른다. 이 결론은 귀나 코 같은 다른 감관에도 당연히 적용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그 실체를 확인할 수는 없더라도 뭔가를 인식하여 알아차리는 기능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고 말할 때의 '마음' 만으로는 소위 일체유심조를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을 지어내는 그 마음을 해명하는 일이 관건이다. 이리하여 유심의 심을 식이라는 말로 대체하고, 이 '식'이라는 마음의 구조를 밝힘으로써 '일체유심조'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 체계적으로 해명하는 데서 유심의 가르침은 유식의 교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불교의 유심론적인 경향이 유식학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상식의 진상
심과 식은 어떻게 다른가? 이 둘은 모든 것을 지어내는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결코 서로 다른 말이 아니다. 다만 의미상으로 식은 마음의 특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의 포괄적인 의미를 한정하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유식'이라고 말할 때의 '식'은 단순한 명사가 아니라, 쉽게 말하면 '의식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유식이라는 말을 쉽게 이해하자면, "오직 의식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유식론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 과정을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그 진상을 밝히는 존재론이다. 교리적으로 보면, 그것은 무상한 세계가 어떻게 무상한지를 밝히는 이론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는 표어는 "모든 것은 오직 의식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諸法唯識)는 표어로 바뀌며, 이로부터 다시 "의식하는 마음만 있고 대상 세계는 없다"(唯識無境)는 유명한 표어로 널리 통용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식'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특별한 의의가 감지되지 않을 것이다. 유식의 식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이 우리의 의식과는 별개의 것으로 외부에 엄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을 거부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상식을 먼저 검토래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미꽃을 좋아하므로 장미라는 대상을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보자. 장미는 그 종류가 엄청나게 많은데도 그냥 장미라는 말로 통칭되는 대표적인 식물이다. 여기서는 장미 두 송이만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는 '장미'라는 말(이것을 'B'라고 표시하자)이 통용되므로, 실물로서의 장미라는 하나의 대상(이것을 'A'라고 표시하자)이 있음을 확신한다. 엄격히 말하면 장미(B)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고 머릿속의 개념이므로 실물(A)은 아니지만, 말(B)은 실물(A)에 그대로 대응한다고 생각하여, 개념인 장미는 곧 실물인 장미라고 생각한다.
대상A(1): 프렌치 장미 대상A(2): 그랜디플로러 장미
어떤 사람이 프렌치 장미를 보고 나서(그 사람은 이 장미의 이름을 모른다), 그것을 보지 못한 다른 사람에게 "저기에 장미가 정말 아름답게 피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자신이 자주 본 적이 있는 장미( 이 장미는 그랜디플로러 장미이지만, 이 사람 역시 이름은 모른다)를 떠올리면서 정말 아름다울 것이라고 동조한다. 이 두사람은 어쨌든 장미라는 대상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두 사람은 저마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그림, 즉 표상만으로 장미라는 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태에서, 말하는 사람이 목격한 장미가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하는가? 듣는 사람이 머릿속에 그리는 장미는 다른 것이므로, 말하는 사람이 목격한 장미가 듣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목격한 장미를 전혀 본 적이 없다면,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목격한 장미의 이름까지 알아내어 아무리 그 존재를 알리려고 애를 써도 듣는 사람이 직접 그 장미를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듣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말 또는 개념과 실물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우를 뒤바꾸어서 말하는 사람이 목격한 장미의 이름을 듣는 사람이 알고 있더라도, 말하는 사람 자신이 목격한 장미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 장미가 두 사람 모두에게 외부의 대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직접 목격하고 있을 때도 그것은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는 그림일 뿐이며, 돌아서서는 그 그림의 존재를 전달할 수단, 즉 말이 없으므로 그 존재를 입증할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 밖에 대상이 따로 존재한다는 상식이 어떻게 성립되는지를 알 수 있다. 첫째로는 눈이나 귀 등의 감각 기관에 의해 그려 낸 영상, 즉 표상을 외부에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둘째로는 그 표상에 붙인 이름, 즉 개념만 가지고도 그것에 일치하는 대상이 외부에 실재 한다고 간주해 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는 표상이 모든 사람에게 일치할 수만은 없는데도 그것을 하나의 이름과 대응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똑같은 하나의 사물을 보고 나서도 그것을 묘사하는 사람들의 그림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애초의 표상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식학에는 "한 가지인 물을 네 가지로 본다" (一水四見)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의 호수가 있을 때, 인간은 그것을 물이나 물결로 본다면, 천계의 사람들은 온갖 보석으로 장엄한 대지로 보고, 지옥의 사람들은 고름으로 가득 찬 강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유는 감각 기관에 의한 표상이 결코 동일한 진실일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근거하는 이름이나 개념도 허위일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말, 즉 개념과 표상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개념은 마음, 즉 의식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표상은 감각 기관이 그려 낸 것이다. 이처럼 서로 기원을 달리하는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이 같은 상식에서 우리는, 장미라는 개념은 곧 장미라는 실물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실물이 따로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성립한다.
우리가 믿을 만한 추리 수단은 인과 관계를 따지는 것이다. 만약 결과가 일정하지 않다면, 그 원인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상식도 인과 관계로 따져 보면, 대상이 외부에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신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장미라는 말과 실물의 관계에서 보았듯이, 장미라는 말이 반드시 지시하는 실물과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실물이 외부에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확신할 수는 없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 즉 개념과 표상뿐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이 만들어 낸 말과 감각 기관이 그려낸 그림뿐이다. 이 그림도 감각 기관이 직접 그린 물질이 아니라, 감각 기관의 기능인 마음 작용헤 불과하다. 유식이라고 말할 때의 '식'은 바로 개념과 표상을 만드는 마음 작용을 가리킨다. 이 마음 작용을 편의상 '의식'이라고 표현하면, "모든 것은 오직 의식되어 있는 것일 뿐"이라는 유식의 의미가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될 만하다.
그러나 유식이라고 해서 '식'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식을 일상적인 용어로 의식이라고 한다면, 이 의식은 심리라고 부를 수 있는 여러 가지 마음 작용들과 함께 어울려서 외부의 세계를 연출해 내는 것이다. 이 연출의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하지만 아직도 상식을 거부하는 유식의 논리가 불교의 독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면, 서양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관념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3강 유식의 식
-꿈의 사실적 체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그것이 백해무익한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끊지 못한다. 그래서 담배 끊었다는 선언은, 당사자의 비장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 난무하는 대표적인 공언으로 간주된다.
물론 담배 끊는 데 성공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 성공은 대체로 결의의 확고함이나 비장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데서 기인한다. 결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고 느낄 만큼 자신의 건강 상태에서 위험을 발견할 때 담배를 끊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더라도 그 인내의 노력은 치하할 만하다. 건강사으이 이유가 없는데도 담배 피우는 고약한 습성을 버리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대부분의 애연가들은 그 사람의 불굴의 의지에 감탄하기에 앞서 '독종'이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끊기 어려운 담배를 비장한 결심도 없고 건강상의 이유도 없이, 단지 마음이 지어낸 허상을 보고 나서 확실하게 끊은 사례가 있다. 하루에 두 갑의 담배를 피우는 골초에 속했던 한 동료는 어느 날, 종일토록 분망한 일정에 시달리며 일과를 마쳤다. 그는 그때서야 자신이 오늘은 담배를 한 대도 피우지 않았음을 알았다.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고도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내친 김에 그대로 더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두 달쯤 견디어 낸 어느 날, 그를 후비고 가는 그 생생한 흡연의 즐거움이 잦아지는 순간, 그는 그 동안 인내해 왔던 노력이 정말 담배 연기처럼 허무하게 스러져 가 버렸음을 알아차리고는 몸부림치도록 안타까워했다. 이때 그는 잠을 깼다. 금연의 파기는 꿈이었고, 실제로는 아직도 금연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안도의 기쁨이었다. 이젠 더 이상 담배 피우고 싶은 생각으로 시달려야 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그는 담배를 끊은 지 12년이 되었다고 하니, 그의 금연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 흡연의 꿈은 비록 마음이 지어낸 허상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담배를 확실하게 끊게 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의 금연 이야기는 "마음은 화가처럼 무서운 도깨비의 모습을 스스로 그려 놓고서는 그것을 무서워한다" 는 불전의 말씀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꿈의 사실적 체험은 유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실례가 된다.
-6식의 식과 유식의 식
불교에서 보통 식(識)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는 이 '식'을 '마음'이라거나 '의식'이라고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선 '식'이라는 말에 꼭 적합한 일상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을 마음이나 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한 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불교에서는 초기의 경전 이래, 소위 '심, 의, 식' 이라는 말로 심리 작용을 총칭하여, 심과 의와 식을 동의어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식이란 '마음뿐' 혹은 '의식뿐'임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혹은 의식을 뜻하는 '식'을 염두에 둔 말이 유식인 것은 아니다.
불교의 일반에서 '식'은 좁은 의미로는 안식(眼識)이나 이식(耳識) 등과 같은 6식의 경우처럼, 주로 인식의 주체를 가리킨다. 눈이나 귀 같은 감관이 저마다 접촉하는 대상을 각각 판별하여 인식하는 주체가 '식'이다. 이 경우의 식은 포괄적으로 말하면 정신의 주체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인식 작용의 근간으로서 인식 기관을 가리킨다. 물론 이 같은 '식'은 판명하여 아는 '인식 작용'이나 그 결과인 '인식 내용'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식'은 넓은 의미로는 대상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사고하는 마음의 활동 일반을 가리킨다.
그런데 유식이라고 말할 때의 '식'은 그 원어를 달리하여 주로 인식 작용, 특히 인식의 결과로 얻게 된 영상인 '인식 표상'을 의미함으로써 독특한 유식 사상이 전개 되었다. 그러므로 불교 일반에서 말하는 '식'과 유식의 '식'을 구분하자면, 전자는 대상을 식별하는 마음의 작용 또는 주체를 가리키고, 후자는 그 식별 작용에 의해 어떠한 영상으로 드러난 인식 내용, 즉 '식별된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식별된 것'을 일상용어로는 표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의 대상은 어떤 모습으로 떠오름으로써, 즉 표상됨으로써 식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식이라고 말할 때 '식'의 원래 의미가 '알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그것이 표상과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 같은 표상으로서의 '식'은 결국 마음속의 영상일 뿐이다.
학자들은 <해심밀경>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이와 같은 의미의 '식'을 염두에 두고서 '유식'이라는 말을 사용한 최초의 예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삼매 중에 떠오르는 여러 영상은 마음과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영상은 '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식의 대상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식의 대상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이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겠지만, 이 말을 이해함으로써 곧 유식의 기본적인 관점도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의 취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리들 주변의 모든 것은 대상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에 의해 나타난 것이므로, 그것은 단지 '식별된 것' 즉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마음을 떠나서 외계에 따로 실제하는 것이 아니다.
- 외계 대상의 허위성
유식의 '식'이란 결국 마음속에 표상으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즉 표상 현상이다. 이 같은 생각에 의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외계의 사물이나 법칙들을 어떻게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의문을 유식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은 꿈속에서처럼 성립한다"고 해명한다. 꿈이란 마음이 지어낸 표상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생생한 체험이다. 그러므로 유식의 '식'이란 단적으로 말해서 꿈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간밤에 나는 그곳에 간 적이 없고 그것을 만진 적도 없었지만, 꿈속에서 나는 그곳에 가서 그것을 만지면서 희비를 체험했다. 이 같은 체험은 우리의 외부에 어떠한 구체적인 대상이 없더라도 그것을 생각으로 지어내어 실물인 양 착각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인간 모두는 지금 긴 꿈속에 살고 있으며 오직 이 진실을 깨달은 부처만이 이 꿈에서 깨어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반박하기에 마땅한 논리도 별로 없다.
어쨌든 꿈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꿈에서의 지각은 현실에서 지각한 기억을 전제로 한다" 는 반박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유식의 관점에서는 이에 대해 "우리의 기억은 현실의 대상을 체험한 지각을 표상한 것이 아니라 의식 자체가 변화한 것이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다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만일 현실 생활에서의 지각이 꿈과 마찬가지로 허상이라면, 우리는 꿈에서 일어나는 지각에 대해서는 허위성을 느끼게 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지각에 대해서는 왜 그 같은 허위성을 느끼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마 다음과 같은 답변으로 이 논쟁을 종결할 수 있을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꿈속에서 겪고 있는 경험의 허위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릇된 상상이나 습관이라는 잠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은 깨달이라는 섬광으로 눈을 뜨지 않는 한, 그들의 경험이 지닌 환각적 성격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같은 답변이 석연치 않다면,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주장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그는 외계의 사실에 관한 지식을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개연성만을 인정했다. 그의 생각을 적용한다면, 외계에 대상이 실제로 있다고 아는 지식은 '아마 그럴 것'이라는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연적인 지식도 인간의 가장 중요한 심적 기능의 하나인 상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흄은 주장했다. 흄이 주장하는 상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망상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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