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정승석 <상식에서 유식으로> 강의록

미송 2009. 12. 23. 09:38

제 6강 생각하는 마음,  말나식

 

-사량과 말나식

 

사실 이러하다면, 우리는 이전의 경험을 기억으로 보관하는 마음과 대상을 경험하여 판별하는 마음 외에 '생각하는 마음' 또는 '사고하는 마음'을 따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 바로 '생각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제 유식학의 용어를 적용해 보자. 이미 설명하였듯이, 기억이란 우리의 경험이 잠재 인상으로 남기는 습관적인 기운, 즉 습기(習氣)를 일상어로 바꾼 것일 뿐이다. 이 습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상태를 창고에 비유하여 장식(藏識), 즉 아뢰야식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습기는 모든 인식의 원인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종자라고 불린다. 그래서 종자란 습기를 원인의 측면에서 부르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한다.

 

<유식이십론>이라는 논서에서는 "식(識)은 자신이 종자로부터 생겨나 대상과 닮은 모습으로 전변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이 사실은 우리가 기억한 어떤 내용과 닮은 인식일 뿐이라느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대상을 기억의 내용과 닮은 것으로 생각하는 심리 작용을 사량(思量)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관을 통해 대상을 직접 판별하지만 사량의 영향은 받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을 전식(轉識)이라고 한다. 전식이란 소위 6식을 가리킨다. 즉 눈, 귀, 코, 혀, 피부에 의한 다섯가지 인식에 여섯째의 위피에 있는 의식을 더한 것이다. 이 6식의 식별 또는 판별 작용을 요별이라고 일컫는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요별은 결코 눈, 귀, 코, 혀, 피부, 마음이라는 여섯가지 기관이 외부의 대상을 식별한다는 의미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요별의 구체적인 의미는 아뢰야식으로 잠복되어 있는 기억 또는 인상이 6식을 통해 표층 의식으로서 현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가지 종류가 뒤섞인 꽃들을 보고 낱낱이 식별하는 것이 요별이라고 한다면, 이 요별은 아뢰야식으로 간직된 과거의 인상들이 의식의 표면으로 끌려 나오면서 명료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요별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모든 인식은 그 형상이 알려지지 않는 불명료한 상태라고 한다. 이 요별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사량이라는 마음 작용이 있다. 

 

위에서 말한 사량이란 곧 생각 또는 사고를 가리킨다. 유식학에서는 이 사량을 담당하는 마음을 6식보다 심층에 있는 일곱째 식으로서 말나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껏 예를 들었듯이, 종자인 기억에 의존하고 잠재 인상인 기억을 대상으로 삼아 기능하면서 그 대상을 식별하는 6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같은 특성에 따라 흔히 염오의(染汚意)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6식을 오염시키는 의식이라는 뜻이다.

 

말나식이 특히 오염의 기능을 지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생각은 대개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선언은 이 사실을 반영한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항상 번뇌가 된다. 불교에서 염오는 번뇌와 같은 말이고 염오인 번뇌는 결국 고통이 된다. 염오의의 본래 의미가 '고통과 연결되는 의식'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는 생각한다는 평범한 심리 작용이 실상을 일찍이 파악함으로써 말나식이라는 또 다른 심층 의식을 주목하였는데, 이는 불교만의 독특한 파악이 아니다. 블교 유식학의 독자성은 최심층 의식으로서 아뢰야식을 상정하고 이것과의 관계에서 말나식의 기능을 파악했다는 점에 있다. 인도 철학 일반에서 말나식의 존재는 '개별적 자아'라거나 '아만', 즉 '자아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인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