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어떤 주례사> 어떤 주례사 / 법정 며칠 전 한 친지가 느닷없이 자기 아들 결혼식에 나더러 주례를 서달라고 했다. 유감스럽지만 내게는 ‘주례 면허증’이 없어 해줄 수 없다고 사양했다. 나는 내 생애에서 단 한 번 처음이면서 마지막인 주례를 3년 전 6월 어느 날 한 적이 있다. 그날 이런 요지의 말을 .. 운문과 산문 2009.01.23
마경덕<비의 발자국> 비의 발자국 / 마경덕 밤새 창문으로 스미는 빗소리, 깊은 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밤비를 소리로 읽는다. 홀로 내리는 비의 발자국소리. 지금쯤 옥상에 심은 토마토의 발목이 흠뻑 젖고 노랗게 익어가는 살구도 자다 깨어 빗물에 얼굴을 닦고 있을 것이다. 칠흑 같은 밤, 까마득한 허.. 운문과 산문 2009.01.21
이태준 <까마귀> 까마귀 "호--" 새로 사온 것이라 등피에서는 아직 석유내도 나지 않는다. 닦을 것도 별로 없지만 전에 하던 버릇으로 그렇게 입김부터 불어 가지고 어스레해진 하늘에 비춰보았다. 등피는 과민하게도 대뜸 뽀오얗게 흐려지고 만다. "날이 꽤 차졌군....." 그는 등피를 닦으면서 아직 눈에 익.. 운문과 산문 2009.01.21
이정 <뱅어포> 뱅어포 / 이정 뱅어포 한 장에 납작한 바다가 드러누워 있다 수 백 수천의 얇고 투명한 바다에 점 하나 찍어 몸이 되었다 무수한 출렁거림 속에 씨앗처럼 꼭꼭 박힌 캄캄한 눈, 눈, 눈 머리와 머리가 포개지고 창자와 창자가 겹쳐진 이걸 무어라 불러야 하나 혼자서는 몸이랄 수도 없어 서.. 운문과 산문 2009.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