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접촉, 그 사이

미송 2009. 3. 10. 10:21

 

접촉, 그 사이

 

 

창을 여는 일이 길을 발견하는 일이다. 머무는 같은 풍경들이 알록달록한 이야기들로 표정을 바꾸고 주황 파랑 황토 지붕들이 개성 강한 사람들처럼 다채롭다. 귀 기울이면 우연찮은 새소리가 들린다. 수맥의 숨소리도 들린다. 창을 여는 일이란 긴장과 설렘!

집들이 어느 순간 성난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갈것 같지만, 저녁이면 꼬물꼬물 밥 짓는 움직임이 있어 다시 창을 연다. 저 속에 사람이 있었구나. 습관처럼 집들의 거동을 살핀다. 일상은 창문 틈서리에 끼인 꽃이기도 하다가 꽃 아닌 무엇이 되기도 한다.

언어의 순례자는 원근법을 쓰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풍경에 화가가 된 듯 덧칠을 하고 기록을 하고 새로움을 만들기도 한다. 노동자, 고역의 밤샘으로 충혈된 동공 속에는 유리 물빛이 고이고 그러고도 모자라는 존재들이다.

 

문득 김수영 평론집에서 본 ‘꽃’이란 시가 생각났다.

 

심연은 나의 붓끝에서 퍼져가고

나는 멀리 세계의 노예들을 바라본다

진개와 분뇨를 꽃으로 마구 바꿀 수 있는 나날

그러나 심연보다 더 무서운 자기상실에 꽃을 피우는 것은 신이고

나는 오늘도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둔한 그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며 하이덱거를

읽고 또 그들을 사랑한다

생활과 언어가 이렇게까지 나에게

밀접해진 일은 없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자아의 형상을 바르게 보고 싶었다. 3년 전, 우연히 걸맞은 모자를 쓰고 나들이 한 것이 화려한 외출이 되었다. 원하는 것은 붓 끝에 혼을 싣는 화가도 언어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달변가도 아니었다. 혼자서도 잘 놀고 무럭무럭 크는 영혼을 갖고 싶었다. 감각의 권태를 깨트리고 싶은 바램, 그러나 무언가에 저항하려는 힘은 달리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의지라서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글을 써 나간다는 것은 위험한 시도였다.

하이덱거는 글쓰기를 죽음을 담보로한 놀이라고 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김수영의 꽃, 그 시에는 관념적이지만 존재에 대한 저항의 느낌이 있다. 꽃과 같은 사물에게나 어떤 특별한 존재에게나 사유를 빌어 다가서려는 몸짓안에는 철학이 사는가 보다.

“벽면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서만 동굴 밖 태양의 실재를 겨우 파악할 수 있는 그가 모든 것이 환영임을 알아차렸을 때, 그 환영을 유발케 한 본체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내적인 고뇌가 시작된다. 불행히도 동굴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그로서는 그것을 찾아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 오직 환영으로써만 실재를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 현상계에 속한 인간의 근원적인 비극이니 그러므로 그에게서 실재란 다만 부재함으로써만 의의를 지닌다. 있는 것이란 없는 것으로써만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2%가 모지란다.

거울을 보듯 옆 사람을 보며 묻는다.

‘나 모지라지?’

‘으응…….’

‘근데, 나도 좀 모질라...’

‘모지라는 거에 모지라는 걸 합치면 뭐야?‘

‘깔깔깔'

 

모자랄수록 넘친다는 원리가 분석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의심을 모르는 바보들만 웃음을 터뜨릴 뿐. 언어로서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존재들. 부재하는 인생은 미완의 아름다움으로 황홀하기만 하여 시인이나 작가는 지상에 부재하는 그 무엇을 향해 끊임없는 비상을 시도한다. 스스로를 불사르려는 고통의 작업 이 고통이 고통에만 머물 수 없기에 오직 그것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화할 수 있는 까닭이다. 제 존재 증명에 나선 이가 어디 시인뿐이랴. 모든 존재는 언어의 순례자이며 자신의 신인 걸.

사과 맛은 사과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입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접촉 그 사이, 존재하는 맛. 책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러므로 나는 끊임없는 접촉을 시도한다. 창을 연다.

 

2009. 3. 6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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