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미송 2009. 3. 19. 16:50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오늘 네 편의 시를 만났다.

함석헌 옹의 하나님, 한용운님의 상자 속에 숨기고 싶은 그리움, 김남조님의 설일, 황지우님의 뼈아픈 후회.

그 중 가장 감명 깊었던 황지우님의 뼈아픈 후회를 되짚고 싶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뿌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가속도 탓일까. 하루치의 경험을 다 논하기가 갈수록 빡빡하다. 시위 벗어난 화살처럼 회귀하는 법을 모르는 시간의 뒤통수가 야속하다. 한 번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시간뿐이랴 만,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도 떠나면 되돌아오기 힘이 드니, 떠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로 뼛속을 통과하는 바람으로 시인은 회한을 토하는 것일까.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구나 하는 회한은 뼈를 쇠하게 한다. 이타적인 사랑뿐이 아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자기애에 그치지 않았던 숱한 사랑을 발견한다. 가장 중요한 부분에 있어 번번이 착각 속에 살아가는 우리인지. 

 

오늘 이 시를 소개해 준 이는 말 한마디 뱉을 때마다 명언이 튀어 나오는 똑똑한 사람이다. 고 입술도 옴팡지게 야무진 여자. 쌍꺼풀 진 눈에 눈빛이 초롱하다. 그러나 충혈된 눈동자에 가끔 습기가 배어있기도 하다. 시를 낭송하기 전, 그녀가 잠시 남편의 이야기를 꺼냈다. 부부는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사람끼리 만나는 모양이라고, 한 쪽이 다정다감하면 다른 한쪽은 조금 묵묵하니 자기만을 고집하는 그런 경우라고. 수치적으로 잘 몰라도 정 반대의 사람끼리 만나 서로서로 균형을 맞추어 가는 게 부부라고 한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랑한다 해도 어찌 인간에게 무조건이라는 것이 끝까지 성립될 수 있을까. 주기만 하는 애정은 결국 상처를 입는다. 내 남자의 여자 인가 하는 아침 연속극 이야기처럼 일방적인 헌신에 지친 여자는 결국 남자를 떠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여자가 올인하여 한 남자를 사랑하는데 남자는 늘 다른 세계가 있어서 빗나가기만 한다면, 여자는 끝내 떠나게 될 것이라는 게 그녀의 의견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빨갛게 달궈진 눈알이 진정되어갈 듯 서서히 시 속으로 녹아드는 그녀를 보며, 그러나 본능보다 우위에 있는 예술을 일깨워 본다. 그녀의 부연 설명을 듣자니, 문득 뼈아픈 후회라는 시가 내 안으로 와락 달려든다.

 

일신우일신이란 어제까지 믿고 행동했던 관념이나 행위, 혁명적 발언들을 폐기처분하는 용기일까. 스스로 지켜왔던 사랑에 대하여 뼈아픈 후회가 거듭돼야만 하는 가슴앓이일까. 인간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이타적이다. 날마다 먼 사막의 먼지바람을 동경하는 슬픈 짐승이다. 돌이켜 보면 후회 없는 사랑이 없다.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넌 그 정도밖에 안되니, 캐묻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사랑. 신기루 같다. 변함없는 잔소리와 함께 실체를 빼앗기는 사랑. 그러므로 사랑에 태만할 수가 없다. 한번 가면 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데, 오류가 나는 사랑을 되풀이 할 수 없잖은가. 

 

긴장해야겠다.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 진단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의 구애로 아직 내 곁에 머무르는 사람들, 끝내는 떠나간 사람들, 사랑이란 이름으로 부숴 버렸던 애인들에게 사죄하고 싶다. 이 한 편의 시를 빌어 용서를 구하고 싶다. 

 

2008. 8. 10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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