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현란하다

미송 2009. 3. 11. 10:35

                          

 

 

                                                                                                      현란하다

 

 

  젖빛 햇살 실비처럼 쏟아지던 산기슭에 칙칙한 돌 뿌리 여럿 불거져 있었어요. 황토 모래 뒤섞여 패인 고랑. 사위는 햇살 옆으로 냉이며 새순이 몰래 솟아나 풀무치 그림자를 밟고 있을 때 행여 내 몸에도 새순 돋을까 두근거렸습니다. 나 멀리 있는 당신이 그리워 당신 눈부신 발길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어디론지 사라지는 게 두려워 소스라치게 무서워했어요. 가까워지면 질수록 당신은 스산한 바람입니다.

 

  밤하늘 철새들 아우성치듯 우리들 몸 참 많이 아픈 사랑이 모두 한 순간일지 모르겠다 생각했습니다. 전율처럼 잦아드는 철석같은 계절이 여울진 산자락 너머에서 이마로 와 잠시 머뭇거립니다. 나는 새처럼 조잘댑니다.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옆구리를 쿡쿡 찍어 보았지요. 소나무 솔방울들이 땅으로 뚝뚝 떨어졌어요. 그 옆으로 참나무 잎사귀들 찰랑찰랑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앞뜰 새싹들 새끼 새처럼 입을 활짝 벌려요. 아침 햇살 까르르 부서질 때 시린 내 마음 꺼내어 봉숭아 빛깔로 물들이자 사방에서 이상한 꽃들이 벌컥벌컥 태어났습니다.

 

  나는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시드는 꽃으로 살아요. 이른 아침 차가운 이슬방울이 이마에 끈끈하게 매달려요. 뒤뜰 소슬바람에 떠는 부용꽃의 가슴 저린 기쁨이 터지는 순간 나는 한 마리 산새가 되어 구름 속에서 눈이 멀어요. 겨우내 눈보라 속에 묵어 있던 봉오리가 배시시 꽃잎을 열어 보이는 순간에 나는 순결을 잃으려 했습니다. 바람은 다른 바람을 몰고 오고 바람끼리 맞부딪혀 흩어지면 그대가 자리 잡은 자리엔 연두색 이파리 여럿 떨어져 우리 텃밭이 되려나요.

 

  뚜껑 열면 은빛 세상. 봄이 일어서려는 동작 앞에서 그대에게 한 발 더 다가서렵니다. 꼬물꼬물 기어 나오는 잎사귀들 달래 냉이 씀바귀 돌 틈 비집고 나오는 속살들이 기지개를 켜는 봄. 입 벌리면 원색 흙 내음 달아날까 꿀꺽 삼켜버리는 3월. 그 바람이 그 잎이 그 낙화가 어지러이 발목 잡는다고 순서 잃은 계절이 채찍처럼 어깨에 떨어지는 황사의 저녁 뿌연 거리를 헤치다 돌아온 당신, 그 때 당신이 보았던 슬픈 태양이 오늘도 여전히 빌딩에 걸렸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오늘도 전기세를 못 내 촛불 켜고 살던 사람이 죽었다고 하네요. 도로 가득한 전조등과 줄지어 선 가로등 불빛 한 바가지 떠가지 못해 아예 불길을 뒤집어쓰고 말입니다. 이 도시에서 봄을 말하지 않겠다 시인의 글에도 넘어가지 않겠다 아니 언제 우리 곁에 시인이 있었던가 슬퍼하던 날, 굶어죽은 자의 입에 꽃을 꽂지 않았습니다. 계절은 연두빛깔 병아리 걸음으로 점 점 더 다가서고 드디어 봄이라하네요. 알 수 없어요. 한 끼니 밥이 그저 미안하기만한 나는…….

 

 2009. 3월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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