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자 <조화로운 독서가> 외
조화로운 독서가(讀書家)
B 타고 남은 재
봄마다 꽃공양 바치던 오두막 뜰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는 유언과 함께
B 사라졌습니다
B의 삶, 추천도서 1호로 꼽으셨다는 큰 집에 사는 M
B의 산중 생활 소소한 감성과 사색과 편안한 언어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해서 M
B의 ‘조화로운 삶’ 3년 전 강력 추천했다는데요
출판사 조화로운 삶에서 발간된 ‘맑고 향기롭게’
M은 참 많은 출판사를 읽었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내가 로미오와 줄리엣이 각기
다른 책인 줄 알았던 것처럼
으악새가 가을에 우는 새라고 우겼던 것처럼
M과 B를 MB로 묶거나 BM으로 바꾸는
우연이라도 그런 실수는
안 해야겠어요.
식품에 멜라민 소동이 한창이었을 때...
식약청을 방문해서 청장으로 부터 브리핑을 듣고,
문제가 된 식품의 포장지에 왜 멜라민 성분이
표시가 안 되어있느냐고 했다는데요.
MB이던 BM이던 우연이 아니더라도,
그런 실수는 안 해야겠어요.
참, 조화로운 독서가에요.
책과 출판사뿐만아니라, 포장지에 이르기까지.
잘, 감상하고 갑니다.
(근데, 빠진 배꼽은 돌려 주셔요)
불편한 봄
기억 속 조팝꽃을 쓰려한다
꽃등 아래 빗방울 소리 들렸다
산도 꽃대처럼 꺾이고 싶어 때로는
뿌리도 강물과 입맞춤 하고 싶어
앙탈하는 독백이 낭만이었던 그 때,
무너지는 성(城)처럼 당신이 밀려들었을 때
연둣빛 알갱이 속 꽃의 이름을 대신 불렀다
언제 불러도 품 속 아름다운 내 강토(疆土)
봄을 맞는다
강줄기 따라 높은 철책을 친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꽃과 어떤 물고기와 어떤 새들 아니 무수히
굉음에 묻혀 죽어가는 저 이유를
행복이란 슬로우건으로 온 죽음의 봄을
부를 수 없는 나는 비관자가 된다
기억 속 조팝꽃을 더 쓸 수 없겠다.
소위, 4대강 (죽이기) 사업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된 감도 있어요.
흔히, 자연을 보호하자고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자연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죠.
한 번 파괴된 자연의 생태계는 절대로, 정말 절대로 복원이
안 되니까...
바다에선 꽃 같은 젊은이들이 죽어 가고,
강에선 자생식물과 토종 물고기들이 죽어 나가네요.
불편하다 못해, 참담한 봄입니다.
사랑의 기원
그대 사랑에
거두어 내야할 거품이 있다면 거두어지기를
감량해야 할 군더더기가 있다면 제하여지기를
제거해야 할 단단함이 있다면 수술되어지기를
그리하여 그대 사랑이
낮 동안에는 그대 태양 앞에서 자유롭고
밤이면 별들 앞에서 자유롭기를
다만 사랑이 단 하나의 존전에서만 노예가 되기를
사랑, 우리의 벌거벗음이 그로부터 왔으니
길 잃은 곳에서도 낮에와 같이 단정하기를.
사랑은 한결 같아서...
사랑이 사람을 저버리는 일은 없지요.
사람이 그 사랑을 버리는 일은 있어도.
사랑의 기원.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욕구를 벗은,
그 단정한 벌거벗음의 자리.
실로,
그러하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산기슭
서늘한 비 산 꼭대기에 얹혀 있네 잿빛 구름이 산을 부둥켜 안고 있네 아무런 경고도 없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렇게 찌그러진 물방울 구슬 내 젖가슴에 스며드네 까칠한 내 몸 파고드네 나는 숨을 색색 몰아 쉬며 휘청휘청 산길을 내려오네 흙바람이 산기슭에 머무네 누런 갈색의 돌멩이들 빙빙 휘돌며 산산이 부서지고 갓 올라온 억새풀 와스스 내 옆으로 물갈래 솟구치며 내려가네 힘차게 솟구치며
얼마를 내려왔을까 산 꼭대기를 쳐다보면서 입때껏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네 솔바람 세차게 불어 구름 곁으로 구름 곁으로 살며시 햇살 내려올 때 잿빛 구름 잿빛 구름 엉켜 엉켜 합치며 흩어지며 아찔아찔한 포말을 뿌리네 저 건너 강 사이 무지개 원색으로 얼굴 표정 밝히고 있네 그때 나 숨 고르지 않았어 전혀 고르지 않았다 낭창낭창 드리워진 수양버들이 조용히 포효하는 쉼터에서.
山頂에 올랐을 때의 뿌듯함은 분명, 가슴 벅찬 일이겠으나
하산 후에 산기슭에서 그 산정을 다시 바라 보는 일도
정상에서의 느낌과는 또 다른, 환희歡喜가 될 것 같습니다.
산기슭 자체로서야, 그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만.
시종여일始終如一의 자리에서 그렇게 큰 포효의 울림으로
가슴에 자리하네요. 산정을 향해 출발했을 때에는 그저,
묵묵默默하기만 했던 산기슭이...
애련(哀憐)
여인의 슬픔은 부끄러움이 많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호수 밑바닥에서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세월 저 편 잡힐 듯한 겨울 저녁
손끝 삭풍의 억지웃음으로
눈물 한 방울 떨구고 간다
태백 당골의 빨간 깃발
국물 밑바닥에 깔린 탄가루를 이고
고개를 넘던 일랭이엄마는
자지러진 무당의 12마당 오열에
정작 검은 울음을 경전처럼 삼켜
해 뜨는 곳에서 잠들었다
열차는 아무도 싣지 않고 떠났다
초라한 나의 30대.
어제부터 몸에 급격히 열이 올라서, 모든 게 다
빙빙 도는데... 시 한편이 지닌 서늘함이
열을 식혀주는 것 같아 오히려 고맙게도 느껴지구.
돌아보면, 제 30대는 그 어떤 치열한 슬픔도
아픔도 없었군요.
어떤 면에서... 시라는 건 시인 스스로에게
알려주는 삶에 관한 설명인지도 모르겠어요.
또한, 한 사람의 시의 주제는 자기 자신의
상징일 수도 있겠고...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는
상징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해 보면서.
희미해지기
원점으로 돌아가야지
누추한 흙에서 비롯된 나
추락이 무서운
어린 새새끼처럼
지워지는 경계와
시끄러운 정체의 틀을 벗고
민들레 홀씨 모습으로
희미하게 낮아져야지
나 이제 스르르
비상의 날개를 접고
무시무시한 낙하를 꿈꾸며
원점으로 돌아가야지
생존의 낭떠러지 밑
저 한없이 낮은 곳
아무것도 뵈지 않는 곳에서
당신 하나로 완성되는
나를 위하여.
신앙시의 골격을 취했지만.
그런 틀 Frame을 떠나 보더라도,
話者의 全생활과 全存在를 한없이 낮아지는 모습으로
그분께 의탁하는 모습이,
그 (희미해지기 끝에)투명한 모습이, 잔잔한 감동으로
읽는 이의 가슴에 자리하네요.
시인, 본인의 낭송으로 감상을 하니...
더욱 좋습니다.
수직 또는, 벽壁
그 남자
00시 00동 00아파트 209동에 살아요
우리 집이죠 아래층은
매일 새벽 여섯시면 요리 시간입니다
매일 저녁 여섯시도 요리시간이지요
추어탕에 생태지게 떡갈비 냄새
묵직한 냄새들만 올라옵니다 미식가의 집일까
그들의 부드러운 혀가 우리에겐 고문입니다
베란다문을 열고 닫다 짐승이 된 우리
사람은 자고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아야 돼
그 한 마디에 게으른 일식 삼찬이 부끄러웠습니다
질투도 나고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후각으로만 만나는 이웃
한동안 냄새가 올라오지 않았고
우리 집도 조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새벽 다시 그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지요
겨울 내내 그 여자 가출했다가 돌아왔나
아니 베란다 문을 닫아놨었네
우린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모든 게 추측일거예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쩌면,
콘크리트 벽으로 단절된 공간에서 스스로
<죄수아닌 옥살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그토록, 선호選好하는 아파트.
(저는 늘, '거대한 닭장'이란 표현을 하지만)
주거생활의 편리성.합리성.투자성만 취取하다 보니,
살가운 이웃이란 인간관계는 애저녁에 사라진지 오래고.
도대체, 내 주위 (위,아래,옆)에는 어떤 이웃들이 사는지 ?
(그것이 알고 싶다 ! 지만)... 실상, 알고 싶어도
잘 알 수도 없는 것이 온통 경계와 의심의 벽과 디지털
자물쇠로 소통疏通의 공간이 완벽히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죠.
어쩌다가,
엘레베이터 앞에서 조우遭遇하는 (이웃일 것 같은?) 사람들도...
그저 서로 이웃일 거란 막연한 짐작 내지 추측만 할 뿐,
정겨운 인사도 없어 서먹한 분위기만 그 무슨 산사山寺의
적막한 고요처럼 흐르고.
(물론,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가 간혹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지만 --- 마치, 고장난 시계처럼)
후각嗅覺으로만 만나는 이웃.
수직 또는, 벽壁 속에 갇혀있는 현대의 생활.
TV 속의 <전설의 고향>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정겨운 마을은 이제 정말 전설이 되고.
온통, 단절斷絶로 가득한 현대의 삭막한 문명을
꼬집어 비평하는 시 한편이라 할까.
하지만 재미있게 읽었다는,
재즈카페
자궁처럼 아늑한 곳에서
초록 이슬방울과
진한 갈색 커피와
낡은 나무의자에 성큼
내려앉는 중량감으로
스산한 재즈 음악 울리네
들꽃 자욱한 곳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하면서
비 지난 후 무지개
거대한 반달로 떠오르는 시각에
숲 속에서 은밀하게 만나네
내 남자는 반짝이는 풀잎 이슬
나는 쓰러질 듯 나른한 안개
거실 후레지아 흔들리는
헤즐럿 향기 혼미한 밤에
이마에 떨어지는 별똥을 만지면서
갈매기 울음 같은 재즈를 듣네
성난 파도 사정없이 밀려 와
먼 바닷가 모래성이 무너지네.
저도 졸시, '신선한 他人'에서
<늦은 카페>를 말한 적 있지만.
그런 분위기의 <재즈카페>라면,
<헤이즐럿>과 더불어 <에스프레소>도
괜찮을듯.
그런데, 거실로 이입移入되는
그 카페의 추억이 왠지 쓸쓸하기도 하고.
암튼,
아직도 가슴 안에 추억으로 살아있는 것.
비(雨) 지난 후,
그윽한 달빛을 받는 그것이
왠지 갸날픈 <후리지아> 꽃과도 같아서,
안쓰럽기도 하구.
또, 그것을 스쳐 간 세월의 그늘이
그것을 한 때 무르익게 만들었던
향기로운 바람과
오버랩 Overlap이 되면서...
이슬에 젖은 눈(眼)이 되는 느낌.
암튼,
추억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인연은
슬프다는 생각도 해보면서.
모르겠네
나쁜 머리로 몇 장의 패스포트를 넘겼는지
저절로 낯설기하기의 대가
대성한 K의 시*를 읽다가 존다
한숨 소리가 먼저 잠든다
시를 쓴 이 필경 귀신이다
외로우면 외로우면 그렇게 다
바람이나 사막, 휘파람 새 되어
이국어로 여행자의 시를 쓰게 되는 것인가
멍청하긴, 꾸벅꾸벅 졸다 실은 쫄기만 하다
잠들기 전 졸도할 것 같은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그 무엇인, 짓!
* 김경주의 시
그 역시, 자기 자신이 하도 낯설어서
그러하겠지요.
시를 쓸때마다,
이게 뭔 짓인가하는 자탄과 함께.
하지만, 그의 시 덕분에 운 좋은? 독자들은
그저 생경하기만 했던 세상과 사람들이
그 무슨 마술에 홀린 것처럼
한 없이 낯익고 정겨워지기도 하지만.
나와 K와 중간지대
그런 걸 보구... 奇緣이라 하지요. |
자유하는 소리
그 '자유하는 소리'에 대하여. |
빗방울 |
빗방울에 환원된, 조화와 深度가
돋보이는 시 한편.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詩 역시 시험문제의 답안지가 아닌 이상...
시에 대한 해석은 시를 읽는 독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겠지만.
의미上, 연聯 구분과 다름이 없는 행간 사이에서...
빗방울로 삼투滲透되는 '너'와 '나'의 뜻을 이해하는 길이
이 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빗방울들 수효만큼, 있는 '너'...
對象에 대한 몰입도 이 정도면,
가히 고문에 가까울터.(話者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걸었던 모든 거리마다 '나'에 중첩重疊되는, '너'
(차라리)... '아무도 없었다'라는 결구가
아프다.
'너'와 '나'를 同一時에 놓기까지
한없이 소란했던 사랑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화엄사상은 석가가 그의 깨달음을 최초로 설한 것인 동시에...
불교의 가장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데. 이른바, 대학원 박사과정이라 할까.
(석가모니가 이걸 설하니, 도시都是 알아듣는 자가 아무도 없어서 일단 이를 접고
그후 초등학교 과정 같은 '아함경'으로부터 다시 설함)
시의 수직적 깊이가 華嚴의 육상원융까지 달하는 건,
아둔한 저로선 헤아릴 길이 없고.
저는 다만, 제 비천한 수준에 맞춰
저 혼자만 느낌의 독백을 주절대며 감상을 했을 뿐.
이점, 시인의 너그러운 이해도 구하며.
추억에 대한 에테르
- 그 밤
아마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면서 설명되지 않을 수 있는 것
가로등 수줍은 불빛이
낭만 투성이 통기타를 치는 듯
밤비가 장난질 치듯
언덕에 내리던 밤
은전 세 닢 손에 쥐고
구멍가게로 달려가던 시절
길을 막은 채 숨 죽이고
우두커니 홀로 서 있던 밤
검푸른 낭만 투성이 시절
목탄난로의 온기가
명치 끝으로 잦아들던 오두막
둔탁한 나무상자 위에
커피 잔을 천천히 올려 놓던 밤.
우선 ,
에테르 Ether의 개념을 살펴 보아야겠네요.
그건 이른바 '물리학에서 빛을 전달하는 매개체'이며,
음파가 공기와 같은 탄성매질彈性媒質에 의해서 전달되듯이...
전자기파 (例를 들면 빛과 X선)의 전달매질로 작용한다고 믿었던,
이론적인 우주의 물질? 인데.
따라서 그건 무게가 없고 투명하고 마찰도 없으며,
일체의 화학적인 방법이나 물리적인 방법에 의해서 探知가 불가능하며,
문자 그대로 모든 물질과 공간을 투과透過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지는 것.
그렇다면,
위의 詩에서 '추억'은 일단 지나간 사실을 '돌이켜 본다'는 점에서
현재의 시간 개념상으론 그 실체가 탐지되지 않음을 말함일까.
('에테르'로서의 의미)
한편,
시에서는 추억이 잠들고 있는 과거시제過去時制의 묘사만 나열되고 있어서
그것은 더욱 현재시제로 메꾸어질 수 없는 것 같으면서도...
과거의 <저 쪽에서 넘긴 시간의 페이지>가 현재의 <이 쪽에서 펼쳐지는>,
묘妙한 일치감一致感을 주고 있네요.
결국, 시에서 말해지는 '에테르'는
과거 '시간의 팔랑거림'이 현재의 '일렁이는 生'에 아직도 유효하게
닿아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요. ('추억이란 기제機制'를 통하여)
그래요,
추억은 결코, 단절은 아닌 거죠.
다만, 만져질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거겠죠.
'추억'이란 지극히 평범한 素材에서... 삶에 잠재되어 있는
그 어떤 근원적 그리움을 잘 소명疏明하고 있는,
시 한편이란 생각도 해보며.
호수
짓궂은 신의 얼굴이다
편편한 절벽이지만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심장이다
몽글몽글한 양털구름
꾹 누르고 붉은 시럽을 뿌리다
화끈 돌아눕는 구름의 등허리 떠밀고 웃는
하늘은 시침 곤두서는 정오의 절정
천의 얼굴 구름과 바람과 호수의 낙조
타들어 가는 해 옆으로 한 자리만 고집하는
시인은 변혁을 주문하는 물살
파랗다.
이미지의 분출이 인상적이네요.
약간은 도발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형성된,
詩語라는 느낌도 들구요.
이 시는 <센테스> 단위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보다,
즉 하나 하나의 문장을 토막내어 읽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일이 바람직한 것 같군요.
(시인도 아마, 그런 시적 의도가 아니었는지? --- 나름, 유추類推컨데)
그게, 그러니까...
언어를 다듬는 인위적인 작업보다는 언어를 받아쓴,
민첩한? 활동이었군요.
뭐, 시인의 시적 동기야 어떻든...
독자는 독자대로 감상할 권리도 있는 법.
어쨌건 저두, 호수는 최종적으로 파랗다는 견해에 동조합니다.
그 이전에 호수의 표정을 말하는 짓궂은 사건? 들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하더라도.
붓질이거나 춤
천상을 향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가슴을 때립니다
모래알 한 줌이 바람결에
내 팔 안쪽에 얹힙니다 한 동안
감각의 틈이 넓어집니다
태양의 붓질은 간지럽고 부드럽고
따스해요 태양이 따스한
그림을 내 살갗에 그립니다
뼈 간 곳을 따라 경계선이 생기네요
무수한 손가락들 그림자가 선명해집니다
소금물 범벅이 된 내 체온이
수평선 쪽으로 질주하네요 내 체온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돌풍에 매달립니다
지상의 살결이 쑥밭이 되고 잠시 후
바다는 숨 멎는 꽃처럼 실신합니다
삽시간에 파도가 풍경화처럼 굳어지고
내 등허리에서 모래알 한 줌 떨어집니다.
詩語의 속도감과 함께 연상聯想으로 이어지는,
그리움의 풍경이 곱습니다.
제 나름의 판단은 일단 유보한 채,
시가 그리는 유려流麗한 線을 따라가다 보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끝없이 펼쳐진
하얀 백사장에서 파아란 하늘에 닿은 수평선을
바라보게 되네요.
<붓질이거나 춤>도 이 정도면,
상식적 차원의 문장 장식이란 목적을 넘어서
- 구체적 이미지로서의 = 조명 + 풍경 + 밀도라는
등식等式도 성립될 것 같구요.
결 고운 상징적 은유로 만나게 되는,
바다의 풍경에 머물다 가네요.
그렇지 않아도,
바다에 너무 가고팠는데.
자율신경 혹은, 창문
내 작은 창문에
빨강 노랑 파랑 남색
알록달록한 구슬발을 내리고
빛의 춤사위를 바라본다
빛줄기 언저리에
탁한 주홍빛으로 끊임없이
번지는 긴장과 충돌
자율신경이 파닥거린다
뜨겁게 혹은 차갑도록 밀고 당기는
빛과 구슬의 무한한 자유
내 작은 창문에
바람이 까르르 웃는 이유는
지구 건너켠에서 비롯된
그 엄청난 빛 때문이었다
빛은 변명하지 않는다
지 존재이유를
누누이 설명하지 않는 빛
그 서늘한 요술 속에서
한사코 부둥켜 안는 우리
자율신경을 대표하는 걸로 '호흡'을 들 수 있겠지요.
(물론, 그 이외에도 심장박동이나 체내 산도酸度 조절 및
홀몬분비 等等 많지만)
암튼, 호흡을 할 때마다...
" 이제 숨을 들이켜야지, 들이켰나? 그럼 다시 숨을 내뿜어야지 " 하고
일일이 의사결정의 생각을 해야한다면, 차라리 안 사는 게 편할지도.
시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시어 하나 하나마다 논리적 잣대를 들이대어야 한다면,
"질식" 그 자체이겠지요.
마음의 窓에 깃든 빛도
그 무슨 좌표설정에 관한 복잡한 계산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요즈음입니다.
하여, 사람과 사람이 포옹하는 것에도
그 원인과 결과를 예리하게 분석해야 한다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게 기쁠 수도 있겠습니다.
빛은 변명하지 않는다
지 존재이유를
누누이 설명하지 않는 빛
그 서늘한 요술 속에서
한사코 부둥켜 안는 우리
일체의 변명이 필요없다 말하는, 시 한편에서...
그렇게 흔히,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되는 '사랑'도
(Must) ...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면서.
말과 섹스하는 여자 *
詩題의 '뉘앙스'로 인해,
추억은 얌전하다
|
추억은 늘 소환당한다는 면에서...
얌전할 수밖에 없는지도.
사진에 견주어 보아도,
그건 칼라보다는 흑백의 질감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잘 감상하고, 갑니다.
남들은 모두, 더워서 돌아가시겠다는데...
몸과 맘이 일년 내내 겨울인 저 같은 사람은
달리 피서갈 일도 없어서
그런 거 하난 좋은 것 같습니다.
거꾸로 도는 시곗바늘
책장을 오른쪽으로 넘기자 시간이 과거로 흘렀다
|
거꾸로 도는 시곗바늘... 하니까.
문득, 스티븐 호킹 Stephen William Hawking 박사가 쓴
'시간은 항상 미래로만 흐르는가'도 생각이 나고.
그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의 천체 물리학자이죠.
루-게릭 병으로 전신마비가 된.
암튼, 그에 의하면...
물리적으로 자연에는 '시간순서보호관'이라는 감독관이 존재해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막는다고 했죠.
마치, 에너지 보존법칙이 에너지가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듯이 말이예요.
그래서, 시간의 진행은 언제나 미래로만.
근데, 그가 간과한 게 있단 생각도 드네요.
물리적 시간과는 별도로 심리적 시간이란 게 있기에.
즉, 인간의 의식은 시간의 역행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죠.
과거를 기억하거나, 추억을 떠올릴 때가 그런 例이지요.
하여, 시에서 말해지는 것처럼...
<돌아보아 죽도록 사랑한 기억이 없다면 와야 할 누군가 아직 안 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지금이 몇시냐구요> 란 질문에...
꼭 오고야 말 그가 서 있는 곳과
지금의 거리만큼의 시간이란 답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런데, 물리학적으로 시간의 역행이 불가능하다고
완전히 증명된 바도 없지요.
호킹의 학설은 그야말로, '설'이니까.
일부 물리학자들 중엔 우주의 팽창 후에
수축이 일어날 때... 시간은 역행한다고도 합니다만.
그건, 그때 가봐야 알 일이고.
암튼, 신선한 소재의 시 한편을 잘 감상하고 갑니다.
기억의 닭
핏덩이 버리고 간 어머니를 찾아
십팔 년 만에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온 호 오빠
그 곳 언어가 무척이나 어려웠다는데요 글쎄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비엔나가 있다고
다이아몬드로 폭탄을 만들고 다이너마이트로 목걸이를 하고
호모 사피엔스가
게이의 시초였다는 그래서
인류최초의 섹스는 동성애였다고,
지기 싫어하는 호의 여친도 달려갑니다
오빠가 선물해 준 화장품을 만지며
크리미아 전쟁이 골드크림을 얻기 위해 터졌다고
6.25동란은 동학란이고
한국동란은 동족상쟁이었으며
이라크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라고,
당신도 엘리베이터 설산에 최초로 오른 사람이
영국의 힐튼 경이라고 알고 있나요
세계 최초로 호텔 체인점을 설립한 사람 말입니다
지금도 치킨에는
부엌에는 기억의 닭들이 정신없이 날아다니죠
호의 여친이 배고파서 전화를 합니다
거기 키친점이죠
양념 키친으로 한 마리 부탁합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시가 그 어떤 상황을 비평적 차원에서 인식하여,
예술적.시적 변장을 하며 등장할 때...
역설逆說은 오히려, 가장 강한 웅변이 되기도 하지요.
그건, 우리들이 대체로 사물과 현상을 意識해서
얻는다는 걸 생각하면... 그런 역설의 따끔함이
명료한 의식을 만들어내는데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구요.
기억의 닭.
닭은 조류이면서도, 날지 못하죠.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철저히 퇴보된 기억과도 같죠.
바람의 이력(履歷)
구름의 화가가 노을을 부르고 있었다
저녁 안개가 자주색으로 물들여지고 있을 때
착착 안기고픈 당신 품처럼 솜털 구름이
바람이 능선을 어루만지며 흩어지고 있었다
구름의 동작은 바람의 내숭을 숨기고 있다
구름은 화가의 손끝에 집중된 눈들을 자신에게 모은다
평가하기에는 구름의 연기력이 바람의 붓질보다 수월하다
피어나는 과실의 꽃들이나
우짖는 나무 위에 새들
붉은 낯으로 스며든 저녁 산 구름들은
어디에서 영원히 살아갈까
갈빛 홍차에 어제 노을이 묻어 있다
구름과 물이 든 바람이 찻잔 사이로 걸어온다
아름다운 꿈 깨어나 별빛을 바라보는
소년처럼.
바람의 이력이 꽤나, 이채롭군요.
어쨌던, 구름의 화가는 시인 자신을 담고 있음일까요.
詩라는 게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수 많은 事象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그 중에 하나를 골라, 대상에서
얻어지는 자극과 반응 또는 상상과 그 연합 및 삭제의
과정을 통해서 對象이 시인의 意識 안으로 빨려들어,
시인과 함께 한 共感帶를 형성할 수 있단 것 자체만으로도
시가 구체적인 삶의 한 방식, 혹은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것에
얼굴 불키며 사나운? 이의異議를 달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름다운 꿈 깨어나, 별빛을 바라보는 소년.
구름 붓 끝에 남겨진, 그림이...
바람의 이력에 쌓여가네요.
우리의 언어로는 운문이 성립될 수 없다 버리지 말고 냅두거라 하셨다 뿌리가 죽지 않았으면 숙주 같은 사랑초 피기 시작한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발긋한 기둥이 솟기 시작했을 때 신기해라 기둥에 감탄사까지 씌웠다 안개꽃 닮은 꽃을 보면 마음들이 떠올라 부드러운 호스(hose)를 대고 묻는다 그는 자그만 꽃잎 하나에 온 우주가 담겼다고 했다 꽃잎 한 장 경영하느라 겨우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무슨 업業이길래 거인이 바다의 울음을 삼켰을까 왜곡된 계절은 겨울이었으나 휑한 동굴이었으나 페이지의 겨울은 또 다른 전주곡이기도 하여 낡은 관용구로 부터 자유로웠던 시간은 사랑초를 기뻐한다 잎 무성한 사이사이 별이 뜨고 희망은 격렬함 없이도 웃는다 사랑초가 나를 위해 웃는다.
<시작노트> |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는데요.
아마도, 원시인류가 구사했던 언어의 형태는
詩적 이지 않았나 하는.
(ex : 깜깜한 하늘에 달 떴다. 어둠의 눈 같은)
한정된 단어와 어휘로써 사물과 현상을 말하자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요즘의 시는 많은 말들 중에 일부러 말을 걸러내지만,
원시 시대에야 워낙 부족한 단어와 어휘라서 걸르고 말고 할 것도
없기에)
아다시피, 우리 한글은 한자 같은 표의表意문자가 아니지요.
하여, 생태적으로 운율성과는 거리가 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두, 미당이나 소월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아한
운율을 보자면 것두, 다 <시인의 역량>에 따른 문제이겠죠.
저두 요즘의 시들을 보자면...
(암튼, 그 무슨 기이한 풍조인지는 모르겠으나
불명료한 산문으로 떡칠을 하고 있는데요)
일찌기, [T.S. 엘리오트]가 그런 말을 했지요.
" 시에 있어 의미의 불명료는 그 시가 보통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의 이하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內包하고 있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 라구.
그런데, 요즘의 이른바 (첨단의 감각? 으로) 발표되는
시들을 보자면...'以上의 의미'는 고사하고
'以下의 의미' 마저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하긴, 요즘 일부 시인들의 시? 란 걸 보면.
일부러, 그 뜻을 모호하게 표현하는 걸 즐기는 것도 같은데...
이건 한마디로, 시인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를 글을 써놓고
저 혼자 좋아해야 한다고 할까.
(참, 웃기는 짬뽕이라는)
시에 머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다 가네요.
백업
달리는 자동차에
슬로우로 길 건너는 탁발승의 옆모습이 스치네
차머리 돌려 낡은 배춧잎 한 장 꽂아주네
삭발한 머리위로 솟아나는 물잔디
인욕바라밀로 돌아가고 있네
아무도 모르게 찬비 맞으며 건너가네
가련하여 아름다운 비오는 날 진풍경
돌아와 나는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네
물기 마르기 전 어깨를 닦네.
*백업[backup] - 삭제되거나 손상된 데이터의 복원을 돕는 절차나 기법.
[시작노트] 비를 좀 맞아보자고 숲 속에 차를 끌어다 놓고 서너 시간 잡설을 떨었다. 내려오는 길에 차창에 스치는 탁발승을 보았다. 운전하던 친구가 '잠간'하며 차를 돌려 그 앞으로 가더니 여비에 쓰라고 만 원을 꽂아주는 걸 구경(?)했다. 불가(佛家)쪽 용어에는 거의 문외한인 내가 친구 따라 강남 다녀온 셈. 이십대로 보이는 탁발승의 파리한 삭발 머리에 물방울이 솟고 있었다. 그것이 친구 옆에 서서 힐긋 본 그의 모습의 전부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다가 문득 찬비를 맞으며 걸어가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뜨거운 물기를 성급히 닦아냈다.
마치,
불가의 禪詩 한편을 대하는 느낌이네요.
脫觀念 , 脫設明이 禪의 核이라 한다면...
이 시 또한 그 어떤 구구한 설명을
필요로 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직지일심直指一心을 말한다고 해야 할까.
(그 어떤 마음의 상태를 찍어 말함)
다만, 시를 대하는 평범한 (衆生스러운)독자의 입장에서
나름 풀어보자면.
탁발승에게 시주한 만 원짜리 한장 (보시布施반야밀)이
솟아나는 물잔디의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로 돌아간다는 대목이
시의 핵인 것 같아, 한참을 머무르게 되네요.
차머리를 돌린 마음(backup)에 탁발승의 입장에선
비루하고 구차한 마음이 들 수도 있었겠지요.
(차머리 돌리기 전에 낡은 배춧잎이나마, 그냥 施主를 받았더라면)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는 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했던가요.
(시의 末尾) 샤워를 하고 물기 마르기 전에 어깨를 닦았다 함은.
소위, 내가 남에게 무얼 베풀었다는 으쓱한 마음을
씻어내렸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아서
깊은 여운이 남네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起心 ...
마땅히 마음이 머무는 바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 베풀지니.
예쁘게 문신을 그리며
낡은 자동차가 퍼졌다
쇼바가 나갔다고 했다
아는 게 병이라고 별안간 자동차가 무서워졌다
파워펌프 스트어링기어 에어크리너 엘리먼트 오일펌프까지
속이 문드러지는 줄도 모르고 끌고다녔던 껍데기
비극의 위대함은 유한한 슬픔 속에 거하고
그리움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안고서 간다
자동차 내부를 들여다 보다 내 몸의 냄새를 맡았다
수컷의 들락임으로 단련되어 헐거워진 자궁 속
산부인과 의사는 원시인의 그것처럼 내려다보았다
한 꺼풀 덮어두었던 몸속에 질병들
허울에 홀려 껍데기만 자랑하며 살아왔구나
굴절 없는 노래 부르고 싶었다고
신열 앞에서 내숭을 떨다 그 때
우수에 깃든 안또니오 마차도를 만났다
<나를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난 모든 걸 너무 가볍게 사랑하는 죄가 있습니다
여리고 가녀린 달의 우수보다, 하나 햇살의 반짝임 하나,
마침맞은 웃음 하나를 사랑합니다>
약해진 팔 부축해 주던
그의 언어로 나는,
4년 전, 중남미문학가들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인 체 게바라, 옥따비아빠스 그리고 안토니오 마차도 (그들 이름은 대체로 길어서 선생님이 출석 체크할 때 애를 먹을 거야) 간간 부족한 족적이 담겨있는 습작수필들을 뒤적이다 보면 그 곳에 보석 같은 시들이 박혀 있는 걸 본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기억 속 나의(?) 시들이 현재성을 띠며 내게로 오는 걸 체험한다. <나를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여기서의 대상은 여자가 맞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반드시 남자만은 아닐 거라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던 거 같다. 왜냐하면 그 때 나는 길을 찾고 있었고 지녀왔던 지도들을 처분한 상태였고 자신 외에는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상처가 자국을 남길 거라면 어느 시인의 책 제목처럼 흉터가 아닌 무늬를 그려보자는 각오였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끄적끄적>
예쁘게 문신을 그렸다 하지만...
시는 참 많이 아프네요.
하긴, 문신이란 게 아픔을 수반하는 일이지만.
그래두, 시인님은 가볍게나마 시인님을 사랑해 준 사람이라도 있으니...
(가벼운 사랑이 그의 죄라면 죄겠지만서두)
저보담은 훨 나으시네요.
저는 아예, 그 사랑이란 것과 담을 쌓고 살고 있으니.
상황설명이 다소 지리한 감도 있어요.
(헐거워짐을 말하기까지 자동차 이야기)
하지만, 마지막 연이 절창이네요.
" 약해진 팔 부축해 주던
그의 언어로 나는, "
21세기형 그녀
정직한 말이 사라지고 본색만 남은 밤이 돌아와도
잘 견디는 우리 귓불 간질이며 까르륵대는 우리는 21세기 탐미주의자다
올림픽 8강보다 열광하게 된 그의 그녀에게
웅숭깊은 하얀 그림자 그 그림자의 그림자는 검은색이다
<화자 불분명한 위의 서술들은 분별력을 잃는 감정전이>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라는 말이 해처럼 떠오르면
먼지의 운동들이 다시 허깨비 화면처럼 보인다
관념에 그치는 포르노 동작들이 허무맹랑하니 돌겠다
복지와 안녕을 위한 명함들을 떼어 버리고
우스꽝스러운 숱한 예들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벌리고 가 아니라 벌이고,
그런 매력에 반해 마부가 달려왔다 했나, 그랬나
세상에서 가장 못난이처럼 살아온 남자
얽히고설킨 사연들을 죽음으로 끝내리라 했던 남자
억울함이란 무엇인가 상대에게 나를 표현할 수 없다는 무능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체념 결국, 언어와 소통의 문제
억울해하다 보면 비굴해진다 머리는 눈물을 혐오했지만
눈은 늘 울고 있었고 주먹은 가슴을 치고 있었다고 말하던 남자
그녀의 난독증과 비슷한 감정이었으므로
난독증은 그녀 평생의 지병이었으므로
제법무아의 아침 도닥이는 손길을 얹는다
<당신이 나의 화두라는 뜻>
시작노트 - 작년 봄 <하얀 그림자의 독백>이란 제 소설에서 발췌한 내용임.
저 같은 20세기형 독자의 입장에서,
21세기형 그녀를 읽는다는 게 고문拷問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암튼,
캄캄한 난독증이 끝까지 읽는 이의 가슴을 짓누르다가...
<당신이 나의 화두라는 뜻>이란 말로 "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하니,
겸연쩍게 발길을 돌립니다만.
어쩌면... 상식에 젖은, 그 타성에 젖은,
하여 매일 꾸벅 졸고있는 제가
시인으로 부터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된통 맞은 느낌도 들고.
헌데, 언어와 소통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네 사연 많은 삶에 있어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구태어 언어(= 시라도 좋고)란 것도
날마다 기를 쓰며 발전할 필요는 없겠지요.
더욱이, 상식적인 線과 方式만을 고집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순 없다는 점에서.
(그게 꼭이, 문학에만 국한된 일도 아니겠지만서도)
좋은 것일수록 |
좋은 것일수록...
지우고, 날려 보내고, 놓아 버리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밥도 조금 더 먹으면 좋겠다 싶을 때...
숟가락을 놓는 게 건강에도 좋은 거라고.
저 역시, 좋을 때 (그니까, 좋은 느낌을 충만히 간직하고 있었을 때)... 접었어야 하는데.
한 번 실기失機 or 失期를 하니,
이제 떠난다고 해도... 그다지 아름다운 일은
아닌 게 되었습니다.
몸도 내 몸인 건지 아닌지 싶게 정신은 출타 중으로 앓다가,
간만에 접속해 보니.
작가시방은
각자의 사연 많은 개인사 (이게 그냥 쓰니 어감이 좀... 個人事)
같은 건 아랑곳 없이,
여전히 저 홀로? 좋은 곳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