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일기

희선 <견해 8>

미송 2010. 9. 20. 20:11

커피가 그리운 날

물을 올리지 않고도
커피의 그윽함을 마신다
한 모금 쌉쌀한 혀끝 느낌이
얼음 칼처럼 짜릿할수록 이후로는
아무래도 좋아 하는 커피,
첫 느낌 강한 커피는
비밀을 간직한 요부(妖婦)다
설송에 싸인 집에서
새벽까지 편지를 쓰던 밤
연거푸 몇 잔의 커피를 마셨는지,
나 그렇게 커피를 곁에 두고
빈 잔에도 주전자 수증기에도
위안을 얻던 시절, 추억마저 서러워하던
시간이 갔다 잔 비우도록
위로받지 못해도, 커피를 마시는
순간이 행복했다 커피에 빠진 나
헤엄치지 않았다.

 

 

빈 잔의 나는...

어떤 커피를 回想하고 있는 걸까.
(요즘은, 커피를 못마시므로)

시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커피 안에서
(시인 대신) 헤엄치는
나의 영혼

왠 일인가.

첫 느낌 강한 커피는...

설령, 비밀을 간직하지 않은 요부妖婦라 해도
무방하다는 것에 한 표.

글치 않아도, 커피 생각이 넘 간절했는데.

(나는 지금 커피의 그윽함을 마신다고, 生 볼륨을 높이는
시 한편에 그저 부러운 눈길만)

 

 

커튼이 있는 방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쓴 여자가
천정 높은 엘리베이터 거울 속 얼굴
화장을 슬쩍 점검합니다
금방 면도를 마친 남자가 거울 속 얼굴
양쪽 구레나룻 길이를 재빨리 확인한 후
서둘러 벽을 관통하여
방사선에 힘입어
자기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사람들의 등허리며 허리가
뚜렷하고 날렵합니다
흐드러진 꽃잎 같은 그녀의
앞섶이 더더욱 느슨해지는 순간
중심을 잃은 사람들의 체온이
벽 속으로 말끔히 씻겨져 사라지고
이제는 아무도 없는 방입니다
고요하게 커튼이 드리워진 방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타고 내리는 엘리베이터.

어찌보면, 참으로 심상尋常한 일상日常일 수도 있습니다.
(그 심상함이 지나쳐, 저 같은 경우는 엘리베이터라는
공간이 그저 답답한 곳이라고만 생각합니다만)

가끔, <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곤 하는데.

시인을 일반인과 구분하려는, 그러니까...
특화特化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서도.

삶 속에서 마주하는 수 많은 대상對象에 <자기 자신>은 물론,
<너와 나> 및 <세상의 모든 것>까지를 결부시켜 시로 형상화形象化 하려는
특이한 견해와 시각視覺을 갖고 있는 이색적인 존재라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네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

저 역시, 이따금 그들에 대해 제 나름의 생각이랄까
짐작 같은 걸 할 때가 있는데... 가끔은 그들의 인생을
그 짧은 시간에 훔쳐 읽어보려는 엉뚱한 충동도 느낍니다.

하지만, 저마다 무표정의 굳건한 커튼이 드리워져
충동 그 자체로 머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요.

혹여, 내 삶이 섣불리 읽히지는 않을까 하는...
그들의 본능적 방어기제防禦機制가 만만치 않기도 하고 해서.

어쨌던, 엘리베이터라는 공간은 대체로
무표정한 서먹함이 가득한 곳인데요.

시인은 용케도, 그 어색하고 좁은 공간 안에서도
짧은 시간에 참으로 많은 걸 읽고 있군요.

사실, 그와 같은 '바라봄'은 경직된 사고思考로는 힘든데요.

뭐랄까...
마치, 어른스러움 속에 아이다운 맑은 시야 Sight라 할까.

그런 시야視野야 말로 대상對象을 <불투명한 전제前提> 혹은 <가로막음>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일 수 있기에...

좁은 공간 안에서 짧은 시간 동안 오가는 사람들의 묘妙한 심리心理 .
(저 개인적 느낌으로는... 그 어떤 성적 충동도 가미加味되어 있는 듯한)

그들이 그렇게 한바탕 등장했다가, 모두 사라진...
하여 이제는 고요한 커튼이 드리워진 엘리베이터.

대상에 관한 관조觀照의 자세가 시인의 심상사고心像思考를 통해,
보다 감각적으로 형상화된 시 한편이란 생각이예요.

 

 

어느 별에서 맞는 아침, 커피맛일까

 

바람의 살갗이 생뚱하다
묘목들 색에 잠기고
탑 위에 남북을 잇는 노랫소리
강물은 빨강 나는 비누거품 같은 영묘한 세계를 사랑한다
시어들 정렬방식에 골몰하다 문득 하늘 아래
부서지는 것들 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창가 햇살이 돋는다 꽃잎이 찻잔 밖으로 넘친다
서성거림 연거푸 마시다 내내 쓸쓸함에 익숙해 가는 우리
나무가 되는 한 모금 물기가 고맙다 가을 빛
마시는 이의 자세에 따라 기울었다 넘쳐났다 하는 마음자리
어지럽다 정돈해 주기도 하는 마술의 시음
너를 느끼는 것만큼 나는 자랐다 결별도 빛이길
우연한 외로움과 맞닥뜨려 나는 노래하고
건너지 못 할 강물과 강물 사이 무지개 흰 구름 종달새
별의 걸음 짧은 치마 아래 날씬한 종아리가 되는
타임머신을 타고 싶어
이런 것일까 시간은 영원함은
잠시 색을 잃음으로써 선명해지는 재회
가을은,

 

 

'그립다' 혹은 '보고 싶다'란 말 한 마디 없이도,
지독한 그리움을 말하는 시가 있지요.

저는 가을에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서...
'커피 香'을 느끼기도 합니다만. (왠,엉뚱한 餘談?)

각설하고.

시인은 가을 풍경을 통째로 마시면서,
'커피'라는 말 한 마디 없이... 아주 진한
'커피'를 마시고 있네요.

'가을은, 잠시 색을 잃음으로써 선명해지는 再會'

--- 사실, 이 표현은 제가 언제 한 번 쓰려던 것이었는데.
(그래서, 뒤로 미룬다는 일은 늘 후회만 되어요)

고즈넉한 가을의 저녁을 닮은, 아침의 커피 한잔에 머물다 갑니다.

 

 

 

곰취향 먹는 법

오래 느끼려면 살짝 데쳐야 한다
우악스럽게 주무르면 손 안 가득하기도 할 것을
온 사방 번져나갈 듯 시샘 나게도 할 것을
소반에 올려놓고 나붓하니 코로 당기는 거다
선승의 그림자 지나갔을 고라니와 산새 겨울을 났을
그 소금강의 곰취 노릇한 삼겹살
오래된 추억까지 끌고 오는 거다
향을 훔친 두상화(頭狀花)만 냉한의 달빛을 핥아 먹는다
곰취이파리 맨질한 살결이 내 허벅지에도 돋는다
출렁이는 사람 하나 갖는 거
나 몰라라 슬그머니 이파리에 속살까지 묻어
혼자 살아온 짐승처럼 침묵할 것 같은
입속에 던져보는 거다.

 

저는 식물의 제목? 같은 거엔 워낙 무지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봄철의 나물이라던가 그것의 맛과 향기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어서 시를 읽고도 곰취향 먹는 법이
잘 파악이 안 된다는.

다만 시를 통해, 미루어 짐작이 되는 건...
곰취란 게 무척이나 향이 진하다는 것.

그 같은 향은 오래된 추억을 동반하는 데
제 격이란 것.

하여, 추억의 순간이 맞닿아 있는 느낌으로
고요하게 번지는 절정의 시간을 입 안에서
슬그머니 되살린다는 것.

저 같은 사람은
설령, 그 곰취향이 밥상에 오르더라도...
그냥 풀반찬? 정도로 생각하겠지만요.

 

 

 

 

달빛 바다

부서지는 파도
톱날 안쪽 같은 파도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수많은 의문부호들이 생선떼처럼 흩어집니다
가까이서 보는 파도와 멀리서 관망하는 바다가
정녕 다르게 보여요 분홍색이며 보라색 빛으로
줄줄 떨어지는 구름의 파편들
파편들을 순순히 받아드리는
바다의 몸부림

달 속에
물이 꽉 차 있어요
달 속에서 반쯤 자고 있는 물은
뜨겁지가 않아요 아무리 손가락으로 휘저어도
수천마리 반딧불이 차곡차곡 쌓여
잉잉 전자반응을 일으키는
당신 양 눈에 비친 두 개의 달 속에서
시원하게 철석거리는 물

 

 

" 달 속에
물이 꽉 차 있어요
달 속에서 반쯤 자고 있는 물은
뜨겁지가 않아요 "

--- " 아씨, 그건 저의 가슴도 인정해요.
느낀다는 것은 명철한 머리보다 나은 것임을"
(요건, 詩 속에 있을지도 모를 머슴?이 하는 말)

그건 그렇구...

시를 읽으니, 오래 전에 찾았던 강릉 '鏡浦湖'도
생각이 나구. (거긴 달이 세 개나 뜨던데)

 

 

 

아침 이슬

내 속에
당신이 만지지 못하는
햇살이 묻어 있네

뜨거움 하나 믿고 몰래
자의(自意)로 태어나는 아침 이슬이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대지의 유액인가 봐, 이건
빛과 빛이 서로 양보하는
고요한 아우성인가 봐

아침 햇살이
나를 적시면서
당신 사랑이 사라지네
백합, 그 가녀린 꽃술에 맺힌
이슬방울들이 시끄럽게 합창하는 아침에

 

 

뭔가,
애틋한 느낌을 주는 시 한편이네요.

아침 햇살의 고요한 아우성 속에
밤 사이... 백합, 꽃술에 맺힌 영롱한 이슬방울이 사라진다니.

어찌보면, 무상無常한 행위로서
사랑에 대한 동경憧憬에서 솟아오르는
연약한 이슬도 연상이 되는데요.

그래도, 삶의 기꺼운 힘은
그 연약한 이슬방울들의 합창 끝에 아스라히 맺히는
눈물 속에서 나타난다는 생각도 해보며...



 

 

 

거울론

 

거울이 눕는다
누운 얼굴이
당신 현존으로
들어간다
열락을 즐길 시간
영원이다


거울론 2

 

당신의 얼굴은 거울
거울을 품은 가슴은
화이트홀을 통과한다
또 다른 피안이
낙엽 위를 뒹군다
어디에도 부재할
깨어난 우리도

 

거울론, 거울론2 .

두편의 시가 모두 호흡이 짧군요.
시가 반드시 짧아야 한다는 法?은 없겠지만...
길고 지루한 시보다는 훨씬 낫다는 한 생각.

블랙홀을 뒤집으면, 화이트홀이 된다지요.

하여,
이 블랙홀 같은 깜깜한 세상에서 전혀 뜻밖에
<당신이란 거울>의 화이트홀을 통해...
내가 미처 몰랐던 <영원 속의 내 환한 얼굴>도 바라보게 됩니다.
나아가, 어디에도 부재不在할 깨어난 우리 이웃들의 얼굴까지.

짧으면서도, 매우 강렬한 (視覺的) 감각이
실린 작품이란 생각.

 

 

 

게도 사랑이 / 오정자   
      
당신 따라 나
새벽 끝까지 갈까 했어
시력이 딸릴 때까지
숨길이 미미해 지는 시각까지
당신 테두리 안에만 머무를까 했어

언젠가 당신 이렇게 말했었지
당신을 달콤한 목소리와
따스한 미소와 밝은 성격 때문에 좋아해
그러나 그게 전부라고는 말 못하겠는 걸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다른 힘이 있는 걸

연민의 정도 마다하면서
사랑만을 위해 사랑하려던
당신 사랑이 나 참 무서웠어
이 순간도 습관처럼 맘 자리를 맴도는 당신
사랑의 조건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사실,
평생토록 진실된 사랑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하고
무덤덤하니 삶을 살다가...

공허하게 세상을 뜨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던지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사랑이라는 말은
영혼의 내실內實을 기期하는 人生이라면
지금, 혹은 이 삶의 어느 과정에서인가 必히 한번 쯤은
만나야 한다는 <事實性의 의미>를 지니고도 있는데요.

그런데, 그 <사실성>이란 게 경제적 효용가치로서의
사람이라는 물건物件? 만 득실거리고 (심지어, 결혼까지도)
사랑으로서의 사람은 거의 없는 이 시대에
그것(사랑)을 획득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도 포함하고 있어서
결코 만만치는 않은 거겠죠.

또, 사람의 本性이란 게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式보다는 '사랑을 스스로 하고 싶다'란 式의 소망이나
이상理想 쪽으로 기울고 있어서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만난다는 것도 로또 1등 당첨만큼이나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더욱이, 참된 사랑은 상대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걸 비우고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요즘 같은 이기적인 세태世態에
그건 너무 힘든 일이며
어찌 보면 그 사랑의 조건이란 게
무서운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아무런 걸림없이 사랑하는 것보다
그러하지 못할 때,
사랑은 더 눈물겹도록 아름다워지니

그러나, 알고 보면 무서운 사랑

지독한 그리움으로 눈은 멀고,
님 찾는 미로(迷路)의 깜깜한 걸음에도
자꾸만 환해지는 이상한 얼굴

깊은 심장 솟구치는 애틋한 불길에
맨 가슴부터 타 들어가
온 몸이 재(灰)가 되도록, 아픈 줄도 모르니

정녕 모르고나 할, 정말 무서운 사랑 

- 졸시, '무서운 사랑'에서

시에서 말하는 '무서운 사랑의 조건'이란 主題에 관해
나름의 부족한 감상으로 머물다 가네요.

되도 않는, '시읽기'라고
너무
까칠하게 타박하진 마시구.


 

출렁이는 보름달 / 오정자

소슬바람 스며들어
담장 넘어 휘어진 감나무 가지
잎새 사이로 하얀 달이 박혀 있네

그리움 삭이는 휘파람 소리
감춰진 숨길 조바심 속으로  
달빛 교교한데
바람이 심술을 부려
가지 끝 둥근 달
날아갈 듯 출렁이네

달 떨어질라 달 떨어질라
떨리는 잎새 건드리는 바람 잡아
낭창낭창 조율하네
척 휘어지는 감나무 가지


낭창낭창 조율하는 건
결국, 시인의 마음이었으리라.

이 詩를 감상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옛 생각 하나.

대학 1학년 때, 비록 저는 經營계열이었지만...
교양학부로서 全 계열의 필수과목이었던 <국어>에서 강의를 하셨던
故 이범선李範宣 교수(소설가.1920∼1981 '오발탄'의 저자)의
말씀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선생은 소설가이면서,
<詩문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는 분이었는데...

소설의 한 대목에 삽입된 시 한 구절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나네요.

"
문학의 목적은 인간이 지닌 정신적 생명력으로서의
모든 힘을 될 수 있는 한限 삶 속에서 최대로 확대하는 것에 있으며,
그런 목적을 위한 통로의 확보는 작가에게 있어 가히 절대적인 것이다.
시 또한 그런 면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대상對象에 접근하는 마음의 통로를
확보하는 것처럼 시인에게 소중한 일은 없다.
" 구요.

위의 詩는, 그런 마음의 통로를 自然 속에서 넉넉히 확보하고...

그 통로를 통해서 흘러온 둥근 그리움의 이미지 Image를
은은하게 펼쳐낸, 한 폭幅의 정갈한 심상화心象畵라는 느낌.

척 휘어지는 감나무 가지에서
출렁이는, 둥근 달.

둥근 그리움은 그렇게,
달에, 시인의 마음에 깃들어 살고 있음을...


 

 

담배연기와 소년

바다를 피워 올리던 피카소의 1억 400만 달러짜리 소년과 함께  
파이프 연기는 누군가의 왼볼을 클릭하고 창고 속으로 들어왔다
눈 속에 박히는 비싼 것들이란 모의模擬를 끝낸 음흉한 보석  
소년인지 파이프인지 피카소인지 삐루인지
동해바다 파도인지 불빛 아래 혹 시인은 아니겠지만
저녁이면 모든 그림들을 제 자리에 돌려 놓고
원근으로 흩어지던 연기들 내 방을 슬프게 빠져 나가곤 하였다.


* 그림,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

 

 

 

피카소의 그림에 이런 것도 있었군요.

비교적 사실적인 기법의 화풍으로 보아,
그가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전의
초기 작품인 듯.

바다를 가지고, 담배연기와 소년을 말하는 게
구체적이고 상식적인 그림으로 부터
추상으로의 새로운 해석을 말함일까요.

예술 작품도 철저히 돈으로 평가되는,
模擬의 세상. (아, 이건 결코 抽象은 아니겠지만)

피카소의 그림도 저러할진데...

앞으로의 세상은 詩도 얼마짜리라는
가격이 매겨질까요.

문득, 피카소가 그림에 자기 이름 대신
가격을 그려 넣는다 생각하니...
파이프의 연기가 왜 슬픈지 알 것 같습니다.

저는 비뚤어진 (금전 만능의)세태를 풍자하는 배경 속에서
모든 그림(= 예술)들을 있어야 할 제 자리에 돌려 놓고,
피카소 그림 속의 슬픈 연기가 슬픔이 닿지 않는 공간으로
승화昇華되는 시인의 소망 같은 것으로 읽혀졌습니다만.

하긴,
詩作과정에서의 시인이 담지하는 의식내용을
우리들 독자가 100% 알 바는 없겠으나...

제 감상의 내용을 연상하게 되는 자연스러움? 또한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군요.

어쨌던, 의식내용을 이미지로 형상화함에 있어
매우 이채로웠단 느낌.

근데, 저두 시를 쓰는 입장이긴해도...

시인들은 이따금 정말 좋은 시를 쓰고 나서도
정작, 시인 자신은 그 시가 탐탁치 않아서

<실패작>이라 하며 구박을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가을 바람, 그때도 그랬지

아지랑이가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올랐을 때
사윈 햇살들이 풀무치들을 밟고 있었을 때
사뭇 그런 예감이 있었다
무구한 시간들이 주춤대는 것을 보았을 때
에푸수수한 머리칼로 나대고 싶었을 때
나침반을 버리고 길 잃으려 했을 때
희망조차 결별을 속삭였을 때
잠든 너의 아름다움을 묻지 않았다
베돌던 바람의 뒤통수를 보았을 때
개펄의 해산물 같은 약속을 남겼을 때
시린 잎사귀들을 보았을 때
떠나는 것들아 낯붉히지 말라 했었다
멈추지 말고 총총 흩어지라고
소멸의 강줄기로 사라지라고
벗겨진 어둠을 맛보리라고
상사(想思)에 죽어갈 나무가 될지라도
권태로운 빛의 알갱이들 한 계단씩 이동하고 나면
시골 정류장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렇게 어둠 속에 어둠 속에
보석들의 광채를 길이 담아 둔
밤과 같은 당신에게


 

저 역시,
시골 정류장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그 대상對象이
가을 같은 사람이라면,
더 할 나위 없겠으나...

그럴 일은 전혀 무망無望하고.

비록,
지금의 나는 누더기 같은 삶이지만.

권태로운 빛의 알갱이들
한 계단씩 이동시키고 나서...
내 生의 그 언젠가 잠시나마 있었던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 속의 나를,
그렇게 다시 만나고 싶어집니다.

이 가을 바람 속에서.


 

 

늑대와 여우 / 오정자


대체로 고요해
저 들꽃처럼

붉은 해 파도 누구의 것이냐 묻는 이 없다
바라봄으로 채워지는 원리
원근법을 익혀 온 우리가
거리가 구원을 준다는 데야
가볍게 웃지

별안간 찾아든 바람에
호명되지 않은 자 행복하다
진군하는 생에 눈이 멀고
파열되거나 해체되는 한 순간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던 건
나를 발견한 이후 최초의 기적

흩어질 점
한 곳 향해 앉을 수 있다면
허울을 묻지 않으리니
둥지를 틀자 무명 숲에
슬프나 담담한 짐승처럼.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像의 초점이 흐려지기도 하지요.

오히려 적당한 거리는 상대를 바라보는,
<탁월한? 遠近法>일 거예요.

그렇게, 바라보다가...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거의 기적과도 같겠죠.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 중에 <意味로서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확률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그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던가요)

저는 平素에 설령, 관념처럼 읽혀지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관념으로 노출되지 않는 것에 시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의 시에서 그것의 전형典型을 만나는 느낌도 들고.

늑대와 여우에서 얼핏, 연상되는 건 남자와 여자인데요.
(아닌가? --- 웃음)

그런 즉흥적 상상력을 배제排除하고서라도,
우선은 독자로 하여금 관심을 갖고 읽게 한다는 점에서
시인 특유의 시적 테크닉 Technique이 돋보입니다.

글쎄요...

들꽃, 붉은 해, 파도, 遠近法과 구원의 관계, 바람의 呼名 ,
진군해 오는 生, 파열과 해체의 순간,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최초의 기적, 흩어질 길과 허울의 길,무명 숲의 둥지,
슬프나 담담한 짐승으로 숨가쁘게 전개되는 일련의
상징적 이미지 Image들에서 삶이 엮어가는
그 어떤 파노라마 Panorama를 보는 듯도 합니다.

어쩌면, 삶이 규정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픔으로서의
<서러운 순응順應>이라는 한 의식意識도 읽혀지구요.

그래요,

늑대와 여우는 그렇게 서로 상대를 통해서 자신이 미처 몰랐던
<영혼의 밑그림>을 그렇게 그려가는지도 모르겠어요.


늑대와 여우.

그들은 혈통적으론, 거의 같은 권속眷屬이지만...

늘 서로 거리를 두고 지낸다는 점에서,
<고요한 원근법>에 통달通達한 짐승이란 생각도 해보며.

또한,
서로의 허울 같은 건 더욱 물으려
(Ask --- Bite가 아닌) 하지도 않고. 


                                                                  - 희선,





[Intime] Chaconne

 

 

 

    정지버튼
    목요일 아침 십대 미소년이 구찌 옷을 보려고 왔다
    나 앉은 녹색가게 창가의 낙엽과 어울릴까  
    나만의 디자인이길 바라는 소년의 빨갛게 튼 입술이
    나의 말끝에 대답을 달고 나가고 남자가 예쁜 건 참 신비한 일이야
    나는 그날 저녁 일부러 걸으며 낙엽을 만졌다
    나뭇잎들 내가 나로부터 멀어져 온 것처럼 뒹굴고 있다

    싹둑 자르긴 뭐해도
    지나간 당신 이야기를 듣는 건 솔직히
    지겨운 냄새가 나 시체 썩는 냄새 같다니까
    나는 모든 못된 말들을 밤새 지우며
    서른 살부터 치주염을 앓아온 고엽 같은 남자에게
    전화한 일을 반성한다

    수박 줄무늬 위에 밑줄 긋듯 낙하하는 잎들
    튕기던 현악줄을 끊어버리고 자각자각
    낙엽을 밟으며 걷는 길
    꾹꾹 눌러쓴 문장들이 만인의 창가에 흩날린다
    흔히 낡아진 잎들은 초라하여서 서성거리게 만드는 길은
    나를 오랫동안 더 직립하게 할 것 같다
    복습은 졸음을 쏟아놓는다
    잠들면 죽은 듯 사라지는 여자처럼
    가을은 그리 쉽게 떠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다.  


    "남자가 예쁜 건 참 신비한 일이야"

    여자가 예쁜 건 더 신비한 일이죠,
    요즘처럼 여자가 남자보다 더 씩씩한 시대에.

    却說하고.

    시인이 눌러놓은 정지버튼에서...

    리와인드 Rewind(되감기)버튼을 누르고,
    다시 플레이 Play(재생)버튼을
    눌러 봅니다.

    그렇군요,

    복습은 졸음을 쏟아 놓기도 하지만,
    건성으로 지나쳐 미처 몰랐던 걸 보게도 해주네요.

    "수박 줄무늬 위에 밑줄 긋듯 낙하하는 잎들
    튕기던 현악줄을 끊어버리고 자각자각
    낙엽을 밟으며 걷는 길
    꾹꾹 눌러쓴 문장들이 만인의 창가에 흩날린다
    흔히 낡아진 잎들은 초라하여서 서성거리게 만드는 길은
    나를 오랫동안 더 직립하게 할 것 같다"

    새삼, 낡은 것이야말로 새로움을 잉태孕胎한단 걸
    다시 깨닫게 됩니다.

    시인이 눌렀던 停止時點을 조금 지나친 가을에서
    저도 정지버튼을 누르고, 갑니다.
    (저 역시, 산다는 일에 조금이나마 더 직립하기 위하여) 
       
    꽃들도 치열한 삶을 위해 이렇게 직립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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