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천양희<벽과 문> 외

미송 2011. 5. 9. 06:11

벽과 문 / 천양희

이 세상에 옛 벽은 없지요
열리면 문이고 닫히면 벽이 되는
오늘이 있을 뿐이지요
새로울 것도 없는 이 사실이
사실은 문제지요
닫아걸고 살기는 열어놓고 살기보다
한결 더 강력한 벽이기 때문이지요
벽만이 벽이 아니라
때론 결벽도 벽이 되고
절벽 또한 벽이지요
절망이 철벽 같을 때
새벽조차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지요
세상에 벽이 많다고 다
낭비벽이 되는 건 아닐 테지요
벽에다 등을 대고 물끄러미 구름을 보다보면
벽처럼 든든한 빽도 없고
허공처럼 큰 문은 없을 듯하지요
이 세상 최고의 일은 벽에다 문을 내는 것*
자, 그럼 열쇠 들어갑니다
벽엔들 문을 못 열까
문엔들 벽이 없을까

* 인도의 선각자 비노바 바베의 말.


절망이 철벽인 사람한테는 새벽이 오는 것도 ‘새 벽’을 더하게 되는 일이라는 말 맞아 참말 벽 앞에 선 느낌입니다. 벽을 갖고 이렇게까지 말놀이가 일어납니다. 말놀이의 기교로 벽을 무시하고 벽을 뚫는 거겠지요. 그러나 벽이 문이 되기 위해서는 벽과 문 사이에 먼저 무슨 시든지 시인 것이 놓이지 않으면 안 돼요. 시인은 그걸 이렇게 놓았습니다. ‘벽에다 등을 대고 물끄러미 구름을 보다보면 / 벽처럼 든든한 빽도 없고’.

<이진명·시인>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일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다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좋은 시가 갖춘 매력 중 하나는 단순성일 것이다. 이 시는 누구에게나 첫출발, 그 시작이 삶의 행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순간임을 일깨운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등 모든 처음들은 다만 제각각의 앞자리일 뿐인데, 이어져오는 삶까지 규정해버린다. 첫 자리가 운명의 고리가 되어 무수한 낱낱들을 한 줄로 꿰어놓는 까닭이다. 한때의 결정이 다음에 올 선택까지 좌우한다는 것은 운명의 가혹한 형벌, 고쳐 살 수 없는 엄혹한 현실이 어떤 처음도 회한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김명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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