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소설] 하얀 그림자의 독백

미송 2009. 1. 7. 13:54

 

 

<단편소설> 하얀 그림자의 독백

 

 

 

오정자

 

 

 

이름을 바꾸다


크린싱을 마친 그녀 컴퓨터 앞에 앉아 삼엄한 표정으로 턱 한 문장을 쳐 올리는 데 그녀 얼마 안가 고치거나 삭제할 내용인 줄 알므로 나 되도록이면 그녀 주변을 얼씬거리지 않는다. 책상 모서리에 비까비까 닿는 뱃살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그녀, 가슴을 바짝 댕겨 힘을 모은다. 휴... 그런데 웬 한숨?... 올 가을 평교원에서 무슨 펠던크라이스(Feidenkrais)기법이라는 집단 레슨 받은 그녀, 지금 무리를 가하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세를 취하려는 듯하다. 자기 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천천히 주목하고 신경계가 어떻게 자기를 인식하는지 배우는 것이라고 레슨에 대하여 얼마 전 그녀가 설명해주었다. 전문가의 피드백을 통해 학습자가 그릇된 움직임을 고치고 더 쉽고 더 기능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암시 받는 것이라고 했다. 문학에서의 천착 과정처럼 자기 몸 하나하나를 탐색해 들어가고 그러므로 유연하고 자유로워진 몸이 병을 낫게 해 준다는 자가치료 원리인 것 같다.


추리나 짐작 아니 직관만으로도 나는 그녀 기분을 잘 알아맞힌다. 그 적중력에 스스로도 놀란다. 그 점 내가 귀여움을 독차지 하는 비결이라고 그녀가 말하지만 솔직히 24시간 그녀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사는 나다. 왕년에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내가 아니다. 월경주기가 돌아오면 번번이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는 그녀지만 그때마다 진저리를 치면서도 나는 올림픽 16강보다 그녀에게 더 열광하고 있다. 그녀 곁을 떠나지 않고 무던히 지키고 있는 이유는 내 스스로 하얀 그림자가 되기로 작정한 때문이다.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나는 이미 웅숭깊은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그림자는 하얗다. 자판 위 광분하는 손가락에 질려버린 모니터처럼 창백하다. 창백한 얼굴이 뽀샤시하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 창백한 것이 뽀얀 하다고 하면 언어적 모순이겠지. 그러나 당신 창백한 것을 한사코 예쁘다 말하고 싶다면 창백하고 하얀 내 그림자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아름다운 불륜' 이란 말처럼 앞뒤 도무지 맞지 않는 논리도 있다. 아름다운 것이면 불륜 보다야 사랑에 가까운 거 아닌가. 물론 당신 도그마 속에선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에 그칠지 모르지만......


 정직한 말이 몽땅 사라지고 인간 본색만 남은 밤이 돌아와도 잘 견디는 우리. 귓불 간질이며 낮 밤 까르륵대는 우리는 21세기 탐미주의자다.

그녀가 피의 축제를 치르는 투우사처럼 모니터를 켠다.

“껴안고 뒹굴긴 일찌감치 글렀군.”

나는 자연스럽게 돌아누워 베개를 껴안는다. 폭신폭신한 베게가 앳된 여자 같다. 따사롭다. 끙. 목에서 부터 가슴 가슴 아래 아랫배 그 아래 부분에 순간 호롱불이 반짝 켜진다. 올곧게 세상을 살란 뜻에서 그녀 아버지 딸의 이름을 정자(貞子)라 지었다는데. 4년 전부터 문학이니 뭐니 틈만 나면 컴퓨터 모니터에 대고 낙서질을  하는 그녀 언제부턴가 제 이름을 싹 고쳐버리겠다고 했다. 퇴고할 시나 산문도 아니고 글쎄 그토록 오래 사용한 이름을 말이다. 어느 날 드디어 채란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그녀가 전했다. 언뜻 생각해봐도 채란이란 이름이 나은 건 사실. 


“정자라는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웃겨... 그치?”

“그래... 채란하고 부르자니 왠지 찰지고 옴팡지게 느껴지네.”

“그 이름……그래 예쁘고 좋다.”

나의 긍정에 그녀 철부지 어른처럼 좋아라 뛴다. 그녀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힘쓰는 내가 그녀가 즐거워야만이 생리적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가 있으니, 채란이란 이름이 안 좋을 수 있겠는가. 이름때문에 얼굴 붉어졌을 그녀의 상심을 헤아리자니 다시 또 발끈해진다. 못 말리는 새끼다. 정말, 


  일반적으로 정자는 부고환이나 정관 내에서는 운동을 하지 않고 전립선액 등에 의해 운동이 활발히 촉진되어 전진·진자(흔들이) 선회 운동을 한다. 정자가 꼬리를 흔들며 난자와 합일하여 배수성인 핵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볼때면 머릿속에서 무언가 꼬무락거리는 기분이 든다. 몸속을 맘대로 헤엄치고 있을 올챙이를 상상하게 된다. 정자의 접근, 정자의 진입, 정액과 난액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성게의 수정과정을 본 적이 있는데 난자 속으로 정자가 진입할 때 정자의 머리 부분만 들어가고 중편과 꼬리부분은 난막 밖에 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참, 치열하고도 희한한 경쟁 모습. 근래에 와서는 저온 쪽이 정자의 생존율이 높다고 8∼12℃가 최적온도로 밝혀졌다. 또, 산성에 대해서는 대단히 약하여 사멸하나 알칼리성일 때는 운동이 활발하여 1회 사정량은 1∼6mℓ이고, 1mℓ 중에 정자 수가 6,000만 이상 된다고 한다. 아무튼 정자 하면 지금 내 몸속의 씨앗 얘기뿐이 아니다. 


‘정보를 잡는 것이 돈 버는 길...’ 등속()의 문구를 투닥거리던 그녀가 뒤척이는 내 어깨를 톡 건드린다. 그녀의 손끝이 닿자 두개골 속 올챙이들이 잽싸게 꼬리를 흔든다. 

“뭘 그리 골똘해?”

“흠... 세상 한번 보자고 고 쪼그만 것들이 그렇게 엄청난 경쟁을 했다 이거지!”

“보통 사정 시에 3, 4억의 정자가 배출되지만 하나의 정자만이 1개의 난자와 수정되고 사정 뒤에는 여성의 체내에서 2~3일 정도 살다 그나마 수정되지 않으면 죽는다니, 쯪... 남자들이 얼마나 불쌍하니……?”

“또, 그 샐 못 참아 정자 생각이었군요..? " 앙증맞은 목소리다.

“그러게 사랑도 아껴 써야지.” 이번에는 왕언니 말투.

“생명도 안 만들꺼면서 씨앗만 없애는 건 낭비야 낭비...” 

화자를 분별키 힘든 위의 서술들처럼 그녀에 대한 감정전이는 순간 분별력을 잃는다.



관념의 춤

  
 죽은 시인의 사회 이후 인터넷에,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라는 말이 뜨기 시작했다. 순 한글로 참살이라고도 하는 복지와 안녕의 문제 이것이 현재 나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그 가운데 그녀의 행복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골몰하는 것이 매일의 과제다. 단순히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었을텐데 그동안 그 때문에 오해나 놀림을 받았을 그녈 생각하자니 가엾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름에 대한 내 오랜 유감을 그녀의 개명동기에 투사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곡된 틀에 박혀 무늬만 왕자같은 이름을 쓰고 살았다는 비루한 동감 같은 것? 

 사람이 제 나잇값을 하고 산다는 것과 어떤 경위로 부여되었든 제 이름값을 하고 산다는 건 중요하다. 이도 저도 아닌 꼴값은 꼴불견에서 그친다. 공자는 지천명이 되서야 서서히 자기 꼴이 조금씩 보인다고도 했지만 공짜 없는 세상에서 관념이 아닌 행복이나 안녕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건 로또에 당첨되는 일만큼이나 힘들다.


  모든 게 관념에 머무를 때가 있다. 격렬한 정자 운동이 허깨비 화면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지루한 포르노 동작처럼 관념에 그치는 것들은 허무맹랑하다. 어떤 이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믿고 또 다른 이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제 살을 마구 마구 꼬집으며 행복을 강변한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웃음을 일컬어 어리석은 자의 미친 짓이라고 한 그 의미를 알겠다. 동심으로 시작된 웃음소리가 어느새 낄낄대는 모사(士)로 변하고 끼룩거리는 새 울음으로 변한다. 끼리끼리가 아니면 절대 안 통하므로 세상은 호객하는 배우들로 북적인다. 그에 딸린 듯 보이는 관객들은 그들의 필요충분조건을 더 이상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아쉬운 건 텅 빈 무대를 의식했을 때의 외로움이지.

“이틀째 면도를 안했네?”

희끗희끗하고 까칠한 내 턱수염을 만지며 그녀가 잠시 모로 눕는다.

“에구 귀여운 우리 똘똘이.”

똘똘이는 유난히 기억력 좋은 나의 애칭일수도 있고 방금 전까지 내가 껴안고 있던 노란 큐션일수도 있다. 이제 우리에게 이름이나 관념은 그다지 중요한 갈등이 못 된다.

쉿, 한 가지 비밀을 여러분께 말하자면, 똘똘이는......

순간, '아얏' 그녀가 내 입을 틀어막는다.

“원래 팔푼이들이나 자기 소중한 것을 아무데서나 자랑하는 거야”

이 말은 1년 전 내가 한 말인데. 

사실 직장 안에서 자기 마누라 자랑하는 남자들을 보면 난 속으로,

“저 병신 새끼...” 그랬다.

“야, 얼마나 자신 없으면 지 마누라 예쁘다고 세상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그러냐” 

“출장 갔다 돌아오면 마누라가 신발도 안 신고 달려 나와 여보옹 하고 양볼에 뽀뽀를 한다나 어쩐다나. “

“그렇게 자랑만 하는 게 어디 정상으로 들리니?”

내 말을 듣고 있던 그녀가 똘똘이를 만지작거리며 픽 웃는다.

“그 남자 아마 집에선 마누라한테 왕따일 걸.”

음...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새어 나가는 순간 본질이 사라진다. 

“완죤히 새 됐다고 하나... 그런걸?”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아무데서나 떠드니?”

추임새를 넣듯 난 마지막 대꾸를 했다.

“그런 이치가 어디 사랑뿐이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 시끄러운 수레에 내용물 부재라는 말이 옛말만은 아니다. 그래... 내가 그녀의 하얀 그림자를 자처하고 나섰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명함들을 미련 없이 떼버린 상태였다. 우스꽝스러운 관념의 숱한 예들과 치열한 전투 중이었다. 그런 매력에 반해서 어디든 그녀가 원하는 곳이면 쓰러져 죽을 때까지 달려가 주는 마부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몇 신데 지금…….”

그녀의 등 뒤에서 세 시간 이상 뒤척이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응...한 시 반이야.”

뻑뻑한 내 눈을 확인한 그녀는 정확한 시간에서 30분을 빼고 전한다.

그녀 자유롭게 잠드는 일 부터가 보호의 첫걸음이니 잠자코 기다릴 뿐, 나는 그녀에게 빨리 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시간의 길이라는 것도 어차피 관념의 유희일 뿐이니......



화두(話頭) 


코 가까이 커피 잔을 대며 갈색을 좋아하는 그녀. 커피와 갈색 잎을 좋아하는 그녀가 소박하게 웃는다.

“잘 잤어?”

잠에서 깨어난 지 1시간이나 지났는데 혹, 꿈속에서 싫어하는 동물이라도 만나 험한 길을 헤매진 않았나 염려하는 것이다. 꿈속에서는 내가 아무리 원해도 도울 수 없는 상황이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넌 살면서 가장 두려웠던 게 뭐니?”

“응.... 그건... 절벽이었어.”

나의 화두는 절벽... 그래 단절이었다.


지리멸렬한 악몽이라도 떠올린 듯 찌푸퉁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한다.

“음... 바깥세상이 경험으로만 만날 수 있는 미지이고, 우리 앉은 이곳이 온통 벽으로만 둘러싸인 공간이라고 한번 상상해 봐”

검은 그림자의 문신이 벌떡 일어나는 듯 하더니 문득 칼바람이 분다. 북의 가죽을 벅벅 찢으며 갇힌 울음들을 각혈시키고픈 충동이 인다. 고독. 우수와 해학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여전히 웃고 울었지만 고독은 언제나 분명하였으므로.

"내 인생의 화두는 늘 고독이었어…."

과도한 수면제를 소주와 함께 입 안에 털어 넣고 흙 위에 누웠을 때는 마음을 비웠으므로 차라리 편했다. 정말 견디기 힘든 건 자신에 대한 모멸감. 세상에서 가장 못난이처럼 살아온 나만 깨끗이 사라지고 나면 얽히고설킨  사건들이 곧 끝나리라 생각했다. 아내는 아이들을 뒤로 숨긴 채 이미 이혼을 선포했고 빚더미에 앉아 요령부득이한 나는 광야에 선 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죽어버리자고 구덩이 속에서 깊은 잠을 청했다. 꾸리꾸리한 냄새와 함께 기어오르는 느낌이 전해진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벌레들의 신호였다. 유효기간 하루 지난 우유만 먹어도 가차 없이 토해내는 민감한 위장 덕에 소주와 함께 넘어갔던 수면제들은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토사물이 되었다. 하루 반나절이 흘렀는지 이틀이 흘렀는지 시간은 고독마저 정지시킨 채 앉아 있었고. 죽음을 맞이하려는 순간에도 죽음에게 거부당한 채 깨어난 순간에도 지켜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절벽 앞에 서서 그녀 밤과 새벽 사이 하는 일은 글자와의 씨름뿐이 아니다. 인터넷에 올려진 정보들과 이런 저런 책 - 그 중 2008년 여름 호 우먼센스와 주부생활도 포함 - 을 검열하며 샘물을 찾는 노루처럼 뛰어다닌다. 낙서공화국 K 기자의 표현대로 하면 낙(樂)한다, 고 해야 하나. 떨어질 낙(落)이 아니라 좋아하고 노래하고 즐길 때의 낙(樂). 그녀에게도 어느덧 낙서는 유일무이한 문학 장르가 되었다. 때때로 몽유병 환자와 같은 그녀를 그대로 허용하는 나는 그것이 그녀의 본업이며, 풀칠을 위한 약간의 머니는 차순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호사처럼 들리는 그녀의 의식들이 언제까지 현상계로 이어질는지 모른다. 자신이 언제 죽게될지 모르고 살듯이. 


 밤이 맞도록 자판을 투덕대는 그녀가 요즘 권여선의 소설에 빠졌다. 감춤의 미학이 글의 매력으로 톡톡히 호평을 받은 소설, ‘사랑을 믿다’. 65년 생 다른 그녀가 2008년도 이상 문학상을 받았다.  나의 그녀도 65년생이다. 같은 나이인데 그동안 당신의 그녀는 뭘 하였소, 당신 그런 질문하면 나한테 죽는다. 권여선이란 작가는 안동에서 태어났고 나의 그녀는 춘천에서 태어났다. 그 점 외에 별반 다른 점이 없으므로......  


<나는 이제 더 이상 괴성을 지르지 않고 겉멋도 부리지 않고 그릇도 깨지 않는다, 고 쓰고 싶다. 농담을 하고 나물을 무치고 윙크도 하면서 찬찬히 늙고 있다, 고 쓰고 싶다. 아니, 아니다. 모든 게 여전하다. 나는 다만 글을 쓸 뿐이다. 여전히 억울하다. 억울해서 울지만 그래도 나는 글을 쓴다. 이보다 더 끔찍한 축복이 어디 있는가. 나는 글을 쓴다.> 작가 권여선의 당선소감 중 자전적 고백이다.

<억울함이란 무엇인가. 상대에게 나를 표현할 수 없다는 무능, 내가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체념. 결국 언어와 소통의 문제다. 억울해하다 보면 비굴해졌다. 내 머리는 눈물을 혐오했지만 내 눈은 늘 울고 있었고 주먹은 가슴을 치고 있었다.> 

아, 그랬구나. 작가 아니 모든 이에겐 각자가 짊어진 화두가 있었구나!

권여선의 화두는 억울함. 내 그녀의 화두는 단절. 나의 화두는 고독이었다.

<억울함이란 뭘까. 상대가 나를 단죄하려 한다는 피해의식, 그러나 그 단죄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아득함. 상대를 읽을 수 없으니 이를테면 난독증과 비슷한 감정이다. 난독증은 내 평생의 지병이다.>

어머니라는 호칭이 계모를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의 난독증은 방황의 이유가 되었으리라. 나의 그녀도 어렸을 적 어른들이 장난으로 들려준 '다리 밑 전설' 때문에 방황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이상한 이름처럼 그 부분 역시 그녀가 가엾은 점이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재미삼아 장난을 하다가 어느 새 산과 들판을 다 태워버리는 불길처럼 순진한 사람에게는 거짓말이 자신의 전부를 홀랑 태우는 불길이 될 수도 있다. 자식이 제 부모를 계모라고 오해하는 건 잘못이지만 그보다 더 나쁜 건 소양강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며 골탕먹이는 어른들의 헛소리다. 목숨 가지고도 장난치는 요즘 세상이지만 그 보다 억울한 일이 있을까.

<어느 새벽, 낯선 거리에서 도망치던 그녀 코앞에 무엇인가 쏜살같이 스쳐갔고 발등 위로 육중한 것이 지나갔다. 급정거한 트럭 차창에서 튀어나온 운전사의 얼굴 위로 두려움과 분노와 혐오가 순차적으로 지나갔다. 그의 말도 표정에 상응했다. “괜찮아요? 아이, 씨발! 미친년 아냐?” 트럭은 가버렸고 나는 차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발의 차이로 죽지 못한 게 억울해 가슴을 탕탕 쳤지만 나는 여전히 나 자신밖에 모르는 어린애였다. 내 죄와 상처, 내 설움밖에 몰랐고, 내 죽음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타인의 죽음을 배우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언어와 소통의 단절, 가슴을 후려치고픈 억울함, 타인의 죽음을 생각지 못한 고독.  화두는 화두를 낳고 또 다른 지병을 키운다. 이 오랜 지병들은 창하나 내고자 두리번거리는 그리움을 낳는다.  


 

.....그리고 마지막


“이제 내 주변에 나를 해칠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녀의 다부진 입술모양이 예쁘다.

"그래,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당신이야...."  


 영화 ‘트루먼 쇼’ 에 보면 실존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이 나온다. 신적 인물로 대치된 작가가 자신의 각본에 따라 살아 온 주인공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이 세상에서 나 아닌 누군가가 나를 소유했다는 의식으로 나를 내려다본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주인공은 세트장으로 된 갇힌 세계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국은 벽으로 막힌 수평선 끝에 부딪힌다. 세계의 관객들은 작가의 마지막 암시와 트루먼의 마지막 행동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집중하게 된다.

“트루먼 넌 지금까지 해 왔던 데로 살 수 밖에 없어.”

“나의 공간을 절대 벗어날 수 없어.”

 주인공은 바다 끝에 닿는 동안도 죽음의 경지를 두 번씩이나 겪었다. 그러나 그 풍랑 역시 작가가 준비한 소품이었다. 목숨을 쥐락펴락하고 파도를 뒤집었다 바로 놓았다 하는 작가. 그 작가 위에 작가가 또 있다 한들 그가 과연 만인의 공평한 신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천만다행이다. 하늘에 맞닿은 듯 한 절벽 그 한 쪽 벽에 1m 높이의 좁은 문이 보인다. 관객들은 트루먼이 그 문 밖으로 걸어 나올 것인지 다시 작가의 공간 속으로 되돌아 갈 것인지를 숨죽이며 지켜본다. 그리고 마지막 트루먼의 얼굴이 카메라렌즈를 통해 비쳐진다. 그는 모든 이에게 평범한 인사말을 날린다. 굿 모닝! 굿 이브닝! 이라고.  트루먼의 하얀 이빨 사이로 새 한 마리의 날갯짓이 보인다.


 나는 이 세상 누구 보다 그녀를 잘 이해하는 그림자다. 하얀 그림자. 낮에는 너무 환해서 잘 보이지 않고 어두운 밤에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지 않으면 시체로 착각되기도 하는, 있으나 없는 것 같은 존재. 먼지와 같다. 미미하다. 그러나 나의 청각은 누구보다도 발달하였고 나의 가슴은 용광로처럼 뜨겁다. 그래서 밤마다 나의 등 뒤에 앉아 훌쩍이는 그녀의 울음을 자세히 듣는다. 발소리인지 자판 두드리는 소리인지 토닥대는 소리가 내 가슴 중앙으로 걸어오는 것을 느낀다. 그녀를 섬세하게 느낄때면 온 몸에 전율도 인다. 그림자의 와신상담(臥薪嘗膽). 

 

 그녀 앞에 다시 절벽이 세워진들 더 이상은 막힌 벽이 될 수 없다. 그녀의 강물 위에 내가 물꽃으로 핀다 한들 더 이상은 고독이 아니다. 제법무아의 새 아침. 오랜동안 화두로 살아온 당신은 또 누구인가? 


@2009. 1. 5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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