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장터
이 정문
초침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계절엔 오차가 없다. 가난한 산하(山河)에 봄이 깔린다. 그 옛날 한강 하류로부터 기어오른 소금배가 뱃길머리 두 갈래 양수리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남한강을 헉헉 거스르다가, 숨이 턱에까지 몰아 찼을 때쯤에 닿을 내렸다는 배말(배마을)에 5일 장이 서, 강변 둔치와 그 위에 올라앉아 낮은 처마를 오밀조밀 맞댄 장터에, 쟁기질에 뒤집혀져 속살 드러낸 촉촉하고 따듯한 흙처럼 사람들이 꼬물꼬물 몰려든다. 표정에 아지랑이 스물거린다. 어느덧 중천에 해가 걸려 낮술에 취한 늙은 장돌뱅이가 많이 받아도 그만, 적게 받아도 그만, 때 이른 떨이를 외치는 오후가 되면 장터는 북새통을 이루고, 나는 그 틈을 비집고 건들건들 돌아다니며, 봄빛 치렁치렁한 나물이며, 겨우 눈뜬 각종 묘목과 팔을 내민 꽃이며, 뭍으로 끌려온 바닷고기며, 박스에서 쏟아져 쌓인 옷가지와 처녀의 눈길 끄는 악세서리며, 젖을 뗀지 몇 달 안 되어 팔려나가는 복슬강아지나 집토끼를 굽어보곤, 사도 그만, 안사도 그만, 내 멋대로 한껏 에누리한 값을 불러 보기도 한다. 먼 산줄기를 타넘어 단숨에 달려온 열차가 장터 바로 옆, 둑 위의 철길을 꾹꾹 눌러 밟아 춤추며 지난다.
자. 무와 당근, 그리고 무엇이든지 이곳에 넣고 착착착착 눌러만 주면 채로 썰어지는 기막힌 물건입니다. 잘게 썰려면 이렇게, 조금 굵게 썰려면 이렇게, 아주 예쁘게 나옵니다. 그저 손바닥으로 눌러만 주세요. 어떻습니까? 기막히게 썰어지죠? 채를 내는데 위험한 칼질을 할 필요가 없어요. 요기에다가, 요렇게 쏙 집어넣고, 위에서 착착착착... 하나에 삼천 원, 천 원짜리 세 장입니다. 이거 하나면 평생 쓰고도 자식 며느리에게까지 물려주고, 저기 아줌마, 어서 하나 사요. 보고만 있지 말고... 채썰이 장수의 달변에 빙 둘러선 사람들이지만 호기심만 보일 뿐 쉽게 사려들지 않는다. 이에 채썰이 장수는 무와 대파, 홍당무와 호박을 기계에 번갈아 넣으며 또 착착착착 손바닥으로 위를 눌러댄다. 잘게 잘게 썰어진 내용물이 수북이 좌판에 쌓이고, 그래도 안사니 호기심을 유발하려고, 또 착착착착... 내 생각엔 채썰기 하나 팔아서 얼마나 남을지 모르지만 무와 대파, 홍당무와 호박 값이 더 나갈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채썰이 장수는 시범을 그만 두곤 하나씩 사가라고 소리소리 지른다. 지나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삐죽 내밀더니 그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는다. 그러자 또 채를 썰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조금 약이 오른 표정이다. 그러나 그것 참 신기하네, 하는 소리만 남기고 아주머니가 뒤돌아서니, 삼천 원짜리 채썰이 하나 팔려면 재료값으로 만 원은 들 것도 같다.
미꾸라지 산 채로 바글바글한 좌판을 지나, 녹두며 대두며 좁쌀이며 율무가 종지에 담겨 가지런한 좌판을 지나, 물에 끓여 먹을 계피와 생강을 사고, 서너 가게를 건너 부침개를 파는 좌판에 앉아 파전이며 메밀전을 하나씩 사먹고, 또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메추리를 구워 파는 좌판 앞에 서서, 좁쌀로 만들었다는 누런 막걸리를 얻어 마셔 본다. 숯불에 연기를 내뿜는 고기가 제법 먹음직하다. 메추리 한 마리씩 주워들은 사람들의 입술이 바삐 움직인다. 나는 차마 두 발을 쩍 벌리고 내장을 송두리째 드러낸 메추리에 손을 대지 못한다. 너무 처연한 모습이다. 서너 걸음 옆으로 옮겨 반찬가게 앞에 서서, 조개젓도 하나 집어 먹고, 어리굴젓도 하나 콕 찍어 먹고, 그러다가 싱싱한 열무김치를 입에 넣어보곤 얼마냐고 묻는다. 하나 더 줘요, 이게 뭐예요? 하는 아낙네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나도 열무를 좀 더 담아요, 오천 원어치가 왜 그리 적어요? 한다.
그제는 둔내장, 어제는 횡성장, 오늘 원주장이 끝나면 내일은 안흥장이다. 산 첩첩 물 겹겹, 흘러내린 백두대간의 주름살 따라 굽이굽이 돌고 넘어가는 샛길 마디마디에, 평생 이 짓거리하며 고달프게 먹고 살았다는, 장터에서 처녀를 만나 장터에서 애를 낳고 장터에서 돈을 벌어, 자식공부 대학공부 다 시켜놓고 보니 다시 장터만 남아, 늙은 아내만 파장처럼 덩그러니 남아, 벌어진 앞니 틈새로 자. 싸고 좋은 물건이요, 떨이로 막 팔아. 손해보고 막 팔아- 쉰 목소리 노을에 젖어들면, 나는 가던 발걸음 멈칫, 야무진 생선장수 아줌마의 손끝에 걸려 팔랑팔랑 넘어가는 천 원짜리 지폐의 숫자처럼 내 인생을 계산해 본다. 이리저리 따져보고 아무리 양보하여 맞춰 봐도,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이 떨이로 흘러내리고 손해 보며 막 팔리고, 난장판 막장판의 흩어진 삶이 분명하여, 저기 등 굽은 노파가 아마 올해는 못 넘길 것이다. 혹한과 꽃샘추위를 겨우 버텨 살아남은 목숨이지만 봄 햇살이 자꾸 눈앞을 가로막아 가물가물, 작년 가을에 땋던 호박을 잘게 썰어 말려 단돈 천 원이라도 손에 쥐려고, 저렇게 마른장작 흙빛 손등을 삐죽한 무릎에 얹어 조그맣게 쭈그린 노파의 검은 병색이 애달파, 머릿속에서 돌아가던 인생 계산기는 그만 고장을 일으켜 버린다. 계산이 안 된다. 정말 계산을 할 수가 없다.
이 장터에서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 태양은 매일매일 사람의 운명을 여지없이 깎아내고 세월을 축내, 하루의 장터와 같은 삶이지만 정작 인생에는 흥정도 거래도 없어 보인다. 오늘은 재수 좋은 날, 마진 좋은 물건 많이 팔려 주머니가 두둑해도, 대박을 터뜨려 물건 내려놓고 돈을 잔뜩 실었어도, 그것은 한 줌 햇살의 댓가. 목숨 한 뼘 썰어 공중에 날리고 주워 올린 휴지 한 장. 이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고혈압, 당뇨병, 신경통, 기침해소에 좋다는 국화차 장수의 투박한 말에 씩 웃는다. 하품을 길게 한다. 춘곤증에 너무 많이 걸었나 보다. 몇 가지 물건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가 무겁게 느껴진다.
(2009. 3월 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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