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일기

시(詩)와 시(時)의 무계약

미송 2011. 11. 15. 09:09

     

     

    시(詩)와 시(時)의 무계약 /오정자

    - 도서관에서

     

     

    시간도 사라진다 너와의 약속과 함께

    심장 혹은, 머리 어딘가에 붙어 다녔을 너와 아니

    나와 지하 1층으로 내려간다

    샛길 불빛 아래 책들이 모여 있다

    쇼파에 앉은 나도 먼 여행을 떠난다

     

    안개 낀 오늘이나 시계가 보이지 않고 멈추고

    그럼 이젠 짐승 같은 시장끼도 사라지겠네요 즐겁게

    자문을 하려는데 바스락 빵 봉지가 움직인다 잼이나

    버터에 빵을 찍어 먹으면 왜 나는 꼭 비빔국수가

    떠오를까 왜,

     

    멋진 약속까지 깨뜨리고 종아리 곧은 사람을

    플라스틱 지붕 아래 온종일 기다리게 두고 호올로

    시를 썼다는 K*를 읽는다 웃으며

    맛이 사라질 때까지 빵을 뜯는다

    급기야 너구리라면까지 휙휙 지나가는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 야수의 저녁

    쉽게 발효되지 않는다 너는 그렇게

    거식과 포식 사이 헛헛한 빵으로 육화되면서

    지상의 시간도 사라진다

    너와의 약속은 어디로 가고 있나.

     

    * 김현승의 '시의 맛' 한 구절.

     

     

    문학적 바탕에서 <시쓰기>를 하는 사람치고, 자신의 人生을 시와 계약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아니, 그 계약은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라 할까. 하지만, 그 약속을 이행한다는 건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지. 돈이 사람의 人格마저 좌지우지하는 이 때에 시쳇말로 시라는 게 돈이 되길 하나 밥이 되길 하나. 더욱이, 이 虛妄한 시대에 시라는 걸 써서 과연 사람 대접이나 받길 하는가.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조차도. (그러니까, 기혼자의 경우엔 아내나 남편을 의미) 생각하면, 참 외롭고 막막한 존재의 삶인 것이다. 이 시대에 (헐렁하고, 알량한)시인으로 산다는 건. 시인은 도서관에서 시를 읽다가, 짐승 같은 시장끼에 쉬이 굴복하는 시간이 울컥 미웠나 보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소리 안 나는 빵을 먹는다는 건 참 탁월한 선택) 오죽하면, 헛헛한 빵으로 육화되는 야수와도 같은 시간이라 했을까. 좀처럼 발효醱酵되지 않을 것 같은 먼 약속의 시간들...파기하고픈, 계약. 그래서, 차라리 詩와 時는 '無계약'이었어야 했던가. 시인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지상의 시간도 사라진다 너와의 약속은 어디로 가고 있나'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나도 아프다. 왜냐하면 <빵>과 <너구리라면>, <비빔국수>는 차치하고...구제역 걸린 소라도, 한 마리 먹을만큼 배가 고파서. <안희선>

     

    * 사족이라 할까 :

     

     金顯承 (1913∼1975)

     

     

    의 맛 / 김현승

     

     

    멋진 날들을 놓아두고

    시를 쓴다.

     

    고궁(古宮)엔 벚꽃,

    그늘엔 괴인 술,

    멋진 날들을 그대로 두고

    시를 쓴다.

     

    내가 시를 쓸 때

    이 땅은 나의 작은 섬,

    별들은 오히려 큰 나라.

     

    멋진 약속을 깨뜨리고

    시를 쓴다.

    종아리가 곧은 나의 사람을

    태평로 2가 프라스틱 지붕 아래서

    온종일 기다리게 두고,

    나는 호올로 시를 쓴다.

     

    아무도 모를 마음의 빈 들

    허물어진 돌가에 앉아,

    썪은 모과 껍질에다 코라도 부비며

    내가 시를 쓸 때,

    나는 세계의 집 잃은 아이

    나는 이 세상의 참된 어버이.

     

    내가 시를 쓸 땐

    멋진 너희들의 사랑엔

    강원도풍(江原道風)의 어둔 눈이 나리고,

    내 영혼의 벗들인 말들은

    까아만 비로도 방석에 누운

    아프리카산(産) 최근의 보석처럼

    눈을 뜬다.

    빛나는 눈을 뜬다.

     

    시쓰기 과정의 행복감과 충만함, 그리고 기쁨은...시인에게 있어 가장 큰 재산인지도. 세속적인 행복과 소유를 포기하고 시를 통한 매혹적? 삶을 선택한 시인은 매사 계산에 밝고 똑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기준에서 보자면, 정말 무능력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겠지만. 아무튼, 시인은 기쁘게 고백한다. 세속적 삶의 일부를 포기하고 체험하는 <시쓰기>는 고독하고 쓸쓸하고 막막한 일이기도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태어나는 내 언어로 새 세상을 빚어내는 어버이의 심정이라고. 빛나는 눈을 뜨는 시의 언어가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희열감은...세상의 그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시인만이 간직하는, 예지叡智인 것이라고. <안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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