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나는 우연히 삶을 방문했다
죽으면 나는 개의 형제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도 양심도 없이
짖기를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네발짐승의 곁으로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
인간 형제들과 함께 있다
기분 좋은 일은
수천수만 개의 따뜻한 맨발들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에
나의 눈동자에 쿵쿵쿵
혈색 선명한 발자국들이 찍힌다는 사실
나는 왔다
태어나기 전부터 들려온
기침 소리와 기타 소리를 따라
환한 오후에 심장을 별처럼 달고 다닌다는
인간에게로,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자
두 개의 심장을 최단거리로 잇는 것은?
직선? 아니다!
인간과 인간은 도리 없이
도리 없이 끌어안는다
사랑의 수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우주에서 배꼽으로 옮겨 온다
한 가슴에 두 개의 심장을 잉태한다
두 개의 별로 광활한 별자리를 짓는다
신은 얼마나 많은 도형들을 이어 붙여
인간의 영혼을 만들었던지!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인간이기 위하여
사랑하기 위하여
無에서 無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이 초라한 간이역에 아주 잠깐 머물기 위하여
—제11회 노작문학상 수상작
《시안》2011년 봄호
오늘 나는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 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오늘 나는>을 나는 권태에 관한 시로 읽는다. 흔들리는 깃털이 목적 없듯이 오늘을 통과하는 내 삶에 어떤 목적이 없다. 해는 떴다가 지고, 낮이 간 뒤 밤은 온다. 수억 년 지구 위에서 되풀이해 온 새로울 게 없는 사실이다. 되풀이는 권태를 불러온다. 이 시는 권태의 나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권태에 사로잡히면 목적에 대한 열정은 휘발하고 욕망은 그 부피가 준다. 권태의 유일한 덕목은 분노와 증오마저 누그러뜨려 외견상으로는 주체의 관용이 커진 듯 보이게 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욕망의 부피가 줄었기에 무욕한 인간으로 비치기도 할 것이다. 실은 관용이 아니라 무욕함이 아니라 그 일체에 대한 나태와 피동성에서 빚어진 사태인데 말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 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
새들의 검은 주검이나 이마에 느는 주름들, 그리고 늦은 밤 이웃집에서 벽에 못 박는 망치질 소리…. 이것들은 삶의 표피에서 일어나는 거품들에 지나지 않는다. 잠깐 이마를 찌푸렸다가 푸는 순간 그 거품들은 지나간다. 세계에 대해 피동적인 사람이 그나마 반짝, 하고 열정을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대할 때뿐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자기 영혼의 가장자리를 따라 여행하는 존재인 것이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지구의 끝,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하더라도 사람은 자기 영혼의 내부를 벗어나지 못한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새로운 풍물이 아무리 넘치더라도 결국은 “우리 존재의 필요와 호기심에 가장 잘 부응하는 것들만” 선택하고 받아들인다. 보라, 시인은 다음과 같이 그 잠언을 새기고 있다. “나는 지상에 태어난 자가 아니라 지상을 태우고 남은 자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최후의 움푹한 것이다. 환한 양각이 아니라 검은 음각이란 말이다. 나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신화들을 읽은 후 비탄에 젖어 일생을 보내다가 죽은 후 다음 생에 최고의 전기 작가로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명심하라. 그 운명을 점지하는 자도 바로 나다.”(<아이의 신화>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권태는 자기방기며, 결과적으로 책임과 의무에 대한 면죄부를 만든다. 어떻게? 망각으로써. 잊는다는 건 삶의 텅빔에 대한 소극적인 부정의 한 방식이다. 공허와 뜻 없음, 실망과 오류들을 잊음으로써 마치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멀리 도망간다. 지난 시절, 죽은 친구들, 소소한 번민들을 잊음으로써 그것들을 과거라는 무덤 속에 묻고 새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 새 삶이라고? 그렇다. 이 시는 끝에 놀라운 반전을 숨겨 놓았다. 만사가 재미없음, 혹은 시들함이라는 징후들을 늘어놓으며 나른하게 펼쳐지던 이 권태의 시는 끝에 가서 팽팽한 긴장으로 조인 사랑의 시로 바뀐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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