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무와 하늘
빗속에서 소요하던 한 그루의 나무,
우리를 지나쳐 쏟아지는 잿빛 속으로 질주한다.
과수원의 찌르레기처럼 나무는
빗속에서 생명을 갈무리해야 한다.
빗줄기 잦아들자 나무도 걸음을 멈춘다.
맑은 밤 깊은 적막 속의 천지에
눈꽃 피어나는 순간을 고대하는 우리처럼
나무는 고요히 기다린다.
2
검은 엽서
1
달력이 꽉 채워지고, 미래를 알 수 없다.
케이블이 국적 없는 포크송을 흥얼댄다.
납빛 고요의 바다에 강설降雪, 그림자들이
부두에서 씨름하고 있다.
2
생의 한가운데서 죽음이 찾아와
몸의 치수를 잰다. 방문은
잊혀지고 삶이 계속된다. 하지만 침묵 속에
옷이 재봉되고 있다.
3
불꽃 메모
암울한 몇 개월 동안, 내 삶은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만 불타올랐다.
개똥벌레가 점화되고 꺼지고, 점화되고 꺼지듯이, 밤의 어둠 속
올리브나무 숲 속에서 눈여겨보면
개똥벌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다.
암울한 몇 개월 동안, 영혼은 움츠러들고 망가진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육신은 당신을 향한 통로를 택하였다.
밤하늘들이 울부짖었다.
우리는 우주의 젖을 훔쳐먹고 연명하였다.
4
두 도시
물의 양쪽에 하나씩 도시가 서 있다.
하나는 완전 암흑, 적이 점령했다.
다른 도시에는 램프들이 불타고 있다.
불 켜진 기슭이 어두운 기슭에게 최면을 건다.
번쩍이는 어두운 물 위를
나는 황홀경 속에 유영한다.
둔중한 튜바 소리가 파고든다.
친구의 음성이다. 그대 무덤을 들고 걸으라.
5
오르간 독주회의 짧은 휴지(休止)
오르간 연주가 멈추고 교회 속은 죽음 같은 정적, 그러나 그건 잠시뿐,
덜컹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더 큰 오르간, 바깥쪽 차량들로부터 뚫고 들어온다.
우리는 차량의 중얼거림에 둘러싸여 있고, 그 소리는 교회 벽을 따라 흐른다.
바깥세상이 그곳에서 투명한 필름처럼, '매우 약하게' 되려 애쓰는 그림자들과 더불어 미끄러진다.
거리 소음의 일부인 양, 고요 속에 고동치는 내 맥박소리를 듣는다.
나와 함께 걸어다니는, 내 속에 숨은 작은 폭포, 내 피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내 피만큼 가까이, 네 살 때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트레일러가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소리를, 지나가며 육백 년 된 교회 벽이 떨리게 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건 어머니의 무릎보다 못할 게 없지만, 그래도 이 순간 나는 아이가 되고,
어른들 이야기 소리를 멀리서 듣고, 승자와 패자의 뒤섞인 목소리들을 듣는다.
푸른색 벤취 위엔 드문드문 신자들이 앉아 있고, 교회 기둥들이 이상한 나무들처럼 솟아 있다.
뿌리도 없고 꼭대기도 없이, 다만 흔한 바닥과 흔한 지붕뿐.
하나의 꿈을 다시 산다. 교회묘지에 내가 홀로 서 있다. 사방엔 시야가 닿는 데까지
히스가 타오르고 있다. 지금 누굴 기다리는 거지? 친구, 오지 않는 거지? 벌써 와 있어.
서서히 죽음이 밑으로부터, 땅으로부터 빛을 피워 올린다. 히스가 빛난다, 점점 더 강한 자줏빛으로,
아니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어떤 색깔로 이윽고 아침의 창백한 빛이 흐느끼며 눈꺼풀을 뜷고 들어오고
나는 깨어난다, 흔들리는 세상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저 흔들림 없는 '어쩌면'의 세계로.
추상적인 세계 그림은 어느 것이든 폭풍의 청사진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집에는 만물박사의 '백과사전', 일 야드의 서가(書架)가 있었고, 그속에서 나는 책읽기를 배웠다.
그러나 우리들은 저마다 자신의 백과사전을 쓰고, 백과사전은 각자의 영혼에서 자라나오고,
백과사전은 태어날 때부터 쓰여지고, 수천수만장의 페이지들이 서로를 압박하며 서게 된다.
그래도 그 사이엔 공기가! 숲 속의 떨리는 잎새들처럼, 모순의 서(書)
거기에 있는 것은 매 시간 변하고, 그림들은 자신을 다시 만지고, 말들은 깜빡거린다.
한 파도가 전(全) 텍스트를 덮치고, 다음 파도가 뒤따르고, 또 다음...
6
숲 속의 집
그곳으로 가는 길에 놀란 날개들이 두어 번 퍼드덕거렸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곳은 혼자 가는 곳이다. 그곳에 있는 키 큰 빌딩은 완
전히 균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빌딩은 언제나 기우뚱거리지
만 붕괴 능력이 전혀 없다. 천 개로 변한 태양이 갈라진 틈으로 들
어온다. 이 햇빛 놀이에서는 전도된 만유인력의 법칙이 지배한다.
집이 하늘에 닻을 내린 채 떠 있고, 떨어지는 것은 무엇이나 위로
떨어진다. 이곳에선 빙그르르 돌 수 있다. 이곳에선 울 수도 있다.
이곳에선 우리가 보통 보따리 싸서 꽁꽁 묶어두는 오래된 진실들
을 볼 수도 있다. 저 아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내 역할들도 날아
올라, 머나먼 멜라네시아의 작은 섬 어떤 납골당 속의 바싹 마른
두개골들처럼 내걸린다. 어린애 같은 햇빛이 무시무시한 트로피들
을 감싼다. 숲은, 그렇게 온화하다.
7
집으로
전화 호출 소리가 밤중에 달려나갔다. 들판 이곳저곳 도시들의
근교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후 호텔방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마치 고동치는 심장으로 숲 속을 달리는 크로스컨트리 경
기자가 손에 든 나침판의 바늘 같았다.
8
변경邊境 너머 친구들에게
1
편지가 너무 빈약하였네. 하지만 내가 쓸 수 없었던 것들은
부풀고 부풀어올라 마침내 구식 비행선이 되어
밤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네.
2
편지는 지금 검열관에게 있다네. 그가 램프를 켜자
불빛 속에서 나의 말들이 창살 속의 원숭이처럼 튀어오르고,
창살을 흔들고, 멈추어서는, 이빨을 드러낸다네.
3
행간을 읽게나. 우리는 이백 년 뒤에나 만날 걸세.
그때는 호텔 벽의 마이크로폰이 잊혀지고
마침내 잠들 수 있겠지, 삼엽충이 되어.
9
커플
그들이 불을 끄자 불빛의 흰 그림자가
어둠의 유리잔 속 알약처럼
잠시 깜빡거리다 용해된다. 다음은 상승.
호텔 벽들이 하늘의 어둠 속으로 치솟는다.
사랑의 동작이 잦아들고, 그들은 잠이 든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내밀한 생각들은 만난다.
학교 다니는 아이가 그림 그릴 때 젖은 종이 위에서
두 색채가 만나 서로서로의 속으로 흘러들 때처럼.
어둡고 조용하다. 그러나 불꺼진 창들과 더불어
도시가 오늘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집들이 다가왔다.
집들이 무리지어 가까이 서서 기다린다.
표정 없는 얼굴의 군중들.
10
고독한 스웨덴의 집들
뒤엉킨 가문비나무와
연기 뿜는 달빛.
이곳에 나즈막이 엎드린 작은 집이 있고
한 점 삶의 기미도 없다.
이윽고 아침 이슬이 웅얼거리고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어
올빼미를 내보낼 때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는 새 건물이
김을 내뿜으며 서 있고,
세탁소의 나비가
모퉁이에서 퍼드덕거린다.
죽어가는 숲의 한가운데서
퍼덕이는 나비 그곳에서 썩어가는 것이
수액樹液의 안경을 통해
나무껍질 뚫는 기계의 작업을 읽는다.
삼단 같은 머리결의 비 또는
한 점 고독한 천둥구름을 동반한 여름이 있고,
씨앗이 땅 속에서 발길질하고 있다.
흔들리는 목소리들, 얼굴들이
황야의 먼 거리를 가로질러
발육부진의 쨉싼 날갯짓으로
전화선 속을 날아간다.
강 속에 있는 섬 위의 집이
자신의 초석礎石을 골똘히 생각한다.
끊이지 않는 연기, 누군가가
숲의 비밀문서를 태우고 있다.
비가 하늘을 선회하고
불빛이 강 속에서 사리를 튼다.
비탈 위의 집들이
폭포의 흰색 황소들을 감독한다.
일단의 찌르레기 무리를 거느린 가을이
새벽을 저지하고,
사람들이 불 켜진 극장에서
굳은 동작으로 움직인다.
이들이 경보警報 없이
위장한 날개들을 느끼고,
어둠 속에 사리를 튼
신神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라.
11
서곡序曲
깨어남은 꿈으로부터의 낙하산 강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들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체계를,
지하의 샹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 기울인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시대들의 수갱竪坑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박임을 관통하는
수직 낙하 여행이 이제 멈추고,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시대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 없는 심연 위에 부동不動으로 걸려 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 아래 서 있다.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 위로 펼져질 것인가?
12
돌
우리가 던진 돌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세월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골짜기엔
순간의 혼란된 행위들이
나무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날카롭게 소리치며 날아간다. 현재보다
희박한 대기 속에서 입을 다문 돌들이
산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제비처럼 미끄러져,
마침내 존재의 변경邊境 지대
머나먼 고원에 이른다.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떨어진다,
바로 우리들 자신
내면의 바닥으로.
13
사물의 맥락
저 잿빛 나무를 보라. 하늘이
나무의 섬유질 속을 달려 땅에 닿았다.
땅이 하늘을 배불리 마셨을 때, 남는 건
찌그러진 구름 한 장뿐. 도둑맞은 공간이
비틀려 주름잡히고, 꼬이고 엮어져
푸른 초목이 된다. 자유의 짧은 순간들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
운명의 여신들을 뜷고 그 너머로 선회한다.
14
아침의 입장入場
태양 선장, 검은등갈매기가 항로를 잡는다.
갈매기 아래로는 넓은 물,
물 속의 다채색多彩色 돌처럼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다.
해독되지 않은 하루, 하루들.
아즈텍 상형문자 같은
나는 음악의 고블랭 비단
덫에 걸려, 팔을 치켜들고
서 있다. 원시 예술에 나오는
인물처럼.
15
크게 파도치는 뱃머리에 평화가
겨울날 아침 지구가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그대는 느낄 수 있다.
숨어 있던 공기의 물결이
집의 벽들을 철썩 강타한다.
지구는 움직임에 둘러싸인 고요의 텐트.
이동하는 세떼들 속엔 비밀의 조타장치가 숨어 있다.
겨울의 우울 바깥으로
숨겨진 악기들의
트레몰로가 솟아오른다. 마치 그대가
무수한 곤충 날개 소리를
머리 위로 들으면서, 여름날
키 큰 라임나무 아래 서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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