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틱낫한 <실존>外 1편

미송 2012. 2. 21. 17:34

     

     

    실존 / 틱낫한

     

    밤이다

    빗방울이 지붕을 때린다

    영혼은 깨어

    홍수로 뒤덮힌 대지

    으르릉거리면서

    사라져가는

    폭풍의 바다를 본다

     

    짧은 순간

    보일 듯 말 듯

    스쳐 지나가는

    빗금들 그리고 어떤 형상들

     

    그 사라지는 순간이

    우울 속으로 기울어 떨어지기 직전,

    말 없는 빗방울 속에 문득

    웃음 소리.

     

     

    이 시는 1965년 사이공에서 씌어졌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죽음과 살인,

    너무나도 많은 파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나는 빗방울 속에서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틱>      

     

     

     

     

    옴도 없고 감도 없고 / 틱낫한

     

     

    집을 떠날 때 나는 아이였다

    이제 늙은 몸으로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사투리를 쓰는데

    내 머리와 수염은 백발이 되었구나

    마을 아이들은 나를 몰라보고

    서로 바라보며 깔깔거린다

     "할아버지, 어디서 왔어요?"

     

    할아버지, 어디서 왔어요?

    "너희들이 있는 바로 거기서 왔단다.

    우리 사이에 있는 고리를 너희가 모르는구나."

    이 아침 나는 흰 수염을 쓰다듬는다

    나무의 어린 잎들은 새롭고 푸르다

    그것들은 오랜 옛날 바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씨앗과

    자기네 사이의 연결고리를 보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사투리를 쓰는구나

    하지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 마을은 너희 마을이 되는 것이란다

    어리둥절한 너희 눈에

    나는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온

    이상스런 늙은이지만

    오고 가고, 떠나고 돌아오고

    우리 가운데 누가 뜨내기 아니더냐?

     

    할아버지, 어디서 왔어요?

    너희는 모른다, 어떻게 알 수 있겠니?

    내가 이 마을에서 배운 옛날 노래를 불러줘도

    너희 눈에는 여전히 낯선 사람이겠지.

    내가 너희에게, "이 마을이 내 마을이란다."

    하고 말할 때

    너희 눈은 춤을 추면서 웃는구나

    내가 옛날 얘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너희가 말할 때

    나 또한 웃을 수밖에

     

    대나무 숲, 강둑, 마을회관

    모두가 그대로다

    그것들은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았다

    새로 돋은 죽순, 새로 얹은 붉은 기와지붕

    새로 생긴 골목길

    새로 태어난 아이

    나는 무슨 목적으로 돌아왔는가?

     

    모르겠다

    지난 날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그네에게는

    진짜로 떠나는 곳도 없고

    도달하는 곳도 없다

     

    삼계(三界)를 탐색하는 자, 그는 누구인가?

    전생(前生)으로 돌아가듯이

    고구마와 순무 뿌리, 건초, 오두막

    나는 내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나 함께 일하고 노래했던 이들이

    오늘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는

    낯선 나그네들이다

    어디에나 아이들은 있고

    붉은 기와지붕도 있고

    좁은 골목길도 있다

    과거와 미래가 서로 마주보며

    두 기슭이 문득 하나로 된다

    귀로(歸路)는 여행을 계속한다.

     

     

     

    1967년, 하이델베르그 성(城)을 방문했을 때 이시를 썼다. 나로서는 처음 가 본 곳이지만 전에 거기 있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시는 당나라 때 한 시인이 지은 4행시에서 영감을 얻어 쓴 것이다. 그 시의 내용은 이렇다. "나 어렸을 적 집을 떠났네. 이제 백발되어 돌아와보니 마을 사람들 사투리는 여전한데 아이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웃으면서 '할아버지 어디서 왔어요?' 묻는구나." 이 시는 옴도 없고 감도 없음을 노래한 것이다. '귀로(歸路)는 여행을 계속한다.'는 베트남의 평화를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른 낫치 마이와 살해당한 네 명의 사회봉사청년학교 학생들의 명복을 빌며 내가 쓴 희곡의 제목이다.

     

    부처를 부르는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여래(如來, Tathagata)다. 그러함(如)에서 왔다가 그러함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금강경에서는 이 이름을, 아무 데서도 오지 않고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 사람으로 해설해 놓았다. 삼계(三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비색계(非色界)를 말한다. 이 삼중세계(triple world)에서 해방된 사람을 '해탈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는 흔히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되어 한 현실에서 함께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 "두 기슭이 문득 하나로 된다. "  나는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뉘어진 두 기슭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건널 수 없는 강으로, 그가 사랑하던 사람들한테서 분리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두 기슭을 갈라 놓는 강물이 있지만,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지 배를 탈 수 있다. '과거와 미래가 서로 바라본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볼 때 그들의 눈은 상대를 비치는 거울인 것이다." <틱>

     

    시집<부디 나를 참이름으로 불러다오> (2002, 도서출판 두레)중에서 발췌한 시.  

     

    옮긴이 이현주(李賢周)

    관옥(觀玉)이라고도 부르며 '이 아무개'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 목사이자 시인이며 동화작가, 번역문학가이기도 하다. 그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글을 쓰고 있으며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선생과 함께 <노자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길에서 주운 생각들] [물(物)과 나눈 이야기] [예수와 만난 사람들] [이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등이 있고 시집으로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노자익] [바그바드 기타] [첫사랑은 맨 처음 사랑이 아니다] [티베트 명상법]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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