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이병률<고양이 감정의 쓸모>외 2편

미송 2012. 2. 24. 19:03

    고양이 감정의 쓸모

     

     

    1

    조금만 천천히 늙어가자 하였잖아요 그러기 위해 발걸

    음도 늦추자 하였어요 허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을 피워야 하고 지고 마는 그 흰 꽃을 지켜

    보아야 하는 무렵도 와요 다음번엔 태어나도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

    이에요

    한번 스친 손끝

    당신은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

    햇빛의 경계를 허물더라도

    나는 제자리에서만 당신 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하나

    의 무의미예요

     

    나는 새를 보며 놓치지 않으려 몸 달아하고 새가 어디

    까지 가는지 그토록 마음이 쓰여요 새는 며칠째 무의미

    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 가지를 날라놓고 가지는 보란

    듯 쌓여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어요 내 바깥의 주인이 돼

    버린 당신이 다음 생에도 다시 새(鳥)로 태어난다는 언질

    을 받았거든 의미는 가까이 말아요 무의미를 밀봉한 주

    머니를 물어다 종소리를 만들어요 내가 듣지 못하게 아

    무 소리도 없는 종소리를

     

     

    2

    한 서점 직원이 한 시인을 사랑하였다

    그에게 밥을 지어 곯은 배를 채워주고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살아지겠다 싶었다

    바닷가 마을 그의 집을 찾아가 잠긴 문을 꿈처럼 가만

    히 두드리기도 하였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를 문장으로 문장으로 스치다가

    도 눈물이 나 그가 아니면 안 되겠다 하였다

    사랑하였다

    무의미였다.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헌 날 우는 새

    들의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

    을 아프게 쏟아놓는 울음 멎게 술 한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멀리 날지도 못하는 새야

     

    지난날을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두운 밤 병 하

    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

    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붉

    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

    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어보아라. 

     

     

     

    한 사람의 나무 그림자

     

    눈 그친 깊은 산사에서였다

    새는 울고 마음은 더욱 허전하여 창호 바깥의 달빛을 

    가늠해보다 인기척에 눈을 비볐다

    옆방에 묵던 수행자가 내 방 앞에 서서 달빛을 가로막

    고 있었다 저물 무렵 마주친 앙상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림자는 먼 곳을 향해 서서 부르르 몸을 떨더니 하나

    둘 옷을 벗어 허공으로 던지는 듯하였다

    그림자는 푸르륵푸르륵 소리를 내며 나무에 올라앉아

    신산스럽게 흔들리는 듯하였다

    잠시 정적이 더 깊어진 듯도 달빛이 진해진 듯도 하였다

    문 열고 마루에 서서 사방을 더듬다 어디론가 이어진 

    발자국을 보았으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 빈방으로 들어가 잠시 누워봤다는 것을

    아마도 불을 봤으리라

    한번 등을 보이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만경창파의

    연(緣)이 있음도 알았으리라

    아마도 그 일로 짜게 울다 갔으리라.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바람의 사생활』『찬란』, 여행산문집 『끌림』 등이 있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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