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감정의 쓸모
1
조금만 천천히 늙어가자 하였잖아요 그러기 위해 발걸
음도 늦추자 하였어요 허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을 피워야 하고 지고 마는 그 흰 꽃을 지켜
보아야 하는 무렵도 와요 다음번엔 태어나도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
이에요
한번 스친 손끝
당신은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
햇빛의 경계를 허물더라도
나는 제자리에서만 당신 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하나
의 무의미예요
나는 새를 보며 놓치지 않으려 몸 달아하고 새가 어디
까지 가는지 그토록 마음이 쓰여요 새는 며칠째 무의미
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 가지를 날라놓고 가지는 보란
듯 쌓여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어요 내 바깥의 주인이 돼
버린 당신이 다음 생에도 다시 새(鳥)로 태어난다는 언질
을 받았거든 의미는 가까이 말아요 무의미를 밀봉한 주
머니를 물어다 종소리를 만들어요 내가 듣지 못하게 아
무 소리도 없는 종소리를
2
한 서점 직원이 한 시인을 사랑하였다
그에게 밥을 지어 곯은 배를 채워주고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살아지겠다 싶었다
바닷가 마을 그의 집을 찾아가 잠긴 문을 꿈처럼 가만
히 두드리기도 하였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를 문장으로 문장으로 스치다가
도 눈물이 나 그가 아니면 안 되겠다 하였다
사랑하였다
무의미였다.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헌 날 우는 새
들의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
을 아프게 쏟아놓는 울음 멎게 술 한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멀리 날지도 못하는 새야
지난날을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두운 밤 병 하
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
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붉
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
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어보아라.
한 사람의 나무 그림자
눈 그친 깊은 산사에서였다
새는 울고 마음은 더욱 허전하여 창호 바깥의 달빛을
가늠해보다 인기척에 눈을 비볐다
옆방에 묵던 수행자가 내 방 앞에 서서 달빛을 가로막
고 있었다 저물 무렵 마주친 앙상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림자는 먼 곳을 향해 서서 부르르 몸을 떨더니 하나
둘 옷을 벗어 허공으로 던지는 듯하였다
그림자는 푸르륵푸르륵 소리를 내며 나무에 올라앉아
신산스럽게 흔들리는 듯하였다
잠시 정적이 더 깊어진 듯도 달빛이 진해진 듯도 하였다
문 열고 마루에 서서 사방을 더듬다 어디론가 이어진
발자국을 보았으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 빈방으로 들어가 잠시 누워봤다는 것을
아마도 불을 봤으리라
한번 등을 보이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만경창파의
연(緣)이 있음도 알았으리라
아마도 그 일로 짜게 울다 갔으리라.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바람의 사생활』『찬란』, 여행산문집 『끌림』 등이 있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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