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무도하가
건너지 못할 것은 다 강이라는 생각,
그러므로 지천으로 널린 것이 강이다
하품하다 흘린 눈물처럼, 슬픔이란
미천한 내가
미천한 그대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
보이지 않게 흐르는 강
울컥 물비린내가 나는 강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하면서도
어쩐지 실패했다는 느낌
나는 헤어질 준비를 다 끝낸 사람처럼
자꾸 허탈하다 그러므로
최대한 밀착된 거리에서 만나고 있다는 거
그건 어쩜 그대를 볼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하여 기꺼이 나는 방종했다는 걸
거리에서 만나는 저 사내
거주지불명의 저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았다
앞을 보면서 그러나 아무 것도 보지 않는
그 눈빛 앞에서 나는 변방의 곽리자고처럼
또 백수광부의 처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대로변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사내여
소주를 마시며 행려도 벗어놓고 구걸도 벗어놓고
사내는 길 건너를 망연히 보고 있다
노상에서 노천에서
끝없이 이어진 사내의 행려가
지금 사내를 내려놓으려는듯
강심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가지런히 신발을 벗었다
길 건너에 있는 사내
강 건너에 있는 사내
물수제비처럼 물에 잠길 사내
2
따뜻한 비
삼촌은 도축업자
사실 피 묻은 칼보다 무서운 건
삼촌이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입에 넣어줄 때,
입속에 혀를 하나 더 넣어준 느낌
입속에선 토막난 혀들이 뒤섞인다.
혀가 가득한 입으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고기에서 죽은 짐승의 체온이 전해질 때
나는 더운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다.
차 속에 빠진 각설탕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녹아내린다.
네 귀와 모서리를 잃는다.
삼촌이 한 점을 더 넣어준다면
심해 화산의 용암처럼 흘러내려
나의 눈물은 금세 돌멩이가 될 것 같다.
-계간 『문학동네』 2010년 가을호 발표
3
훌라후프를 돌리는 여자
당신은 훌라후프를 돌리네
당신은 유연한 허리를 가졌어
허리춤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당신은 여유만만하게 훌라후프를 돌리네
잡지를 보면서 TV를 보면서
당신의 훌라후프 솜씨는 뛰어나서
허리춤에 훌라후프를 매달고 내게 말을 거네
당신은 훌라춤을 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신상품을 광고하는 나레이터 모델 같기도 하네
원래 그 자리에서 돌고있는 행성처럼
당신의 훌라후프는 변함없이 돈다네 그럴 때면 나는
훌라후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해보네
내가 당신의 원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어 훌라후프를 돌린다면
이건 좀 변태적이지 훌라후프는
쉬지않고 당신의 허리춤을 도네
당신의 허리는 참으로 유연하다네
유연한 당신의 허리
유연한 당신의 훌라후프
당신은 TV를 보며 깔깔거리다
그렇지않아? 말을 건네네
유연함이 바로 당신의 무기라네
유연한 허리를 위하여
당신은 훌라후프를 돌리고 나는 그것을 보네.
4
仲秋 부근
양계장집 사내는 대머리
벌어진 어깨 근육이 잘 발달된 사내는
60가까운 나이가 무색할만큼 건장하다
사내는 양계장 옆에 개를 키울 생각이다
충성스러운 동물들은 밤마다 컹컹 짖어댈 것이다
인부들과 함께 새로 들여온 자재를 옮기다
우리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뛰어오는
사내의 얼굴과 몸이 땀에 젖었다
스물 넷인가 그쯤
사내의 아들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일요일 오후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사내와 사내의 아내는
거적을 둘러쓴 하얀 맨발을 보았고 지나쳤을 뿐
검은 제복을 입은 불안이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사내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젊은 경찰관이 찾아왔을 때 그제서야 사내는
현관에 놓여있는 아들의 신발을 보았다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아들이
이제 제 그림자를 어둠 속으로 풀어놓기 시작하는 나무 곁에서
떨어졌을 때의 모습 그대로 놓여있었다
사내도 사내의 아들도 외아들이었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키워서 죽이기 위해
사내는 닭을 키우고 다시 개를 키울 것이다
작업중인 사내의 대머리에서 연신 땀방울이 샘솟는다
고인 땀들이 사내의 눈고랑을 파고드는지
약간 찡그린 웃음으로 사내는 악수를 받았다
조카는 서울에서 공부한다면서?
그래 건강이 최고다 잘 지내라
이거 어제 걷은 건데 신선할거야
건네진 달걀들은 오와 열을 잘 맞추어진 채 가지런하다
중추절이 가까운 가을의 햇살은 눈부시고 따갑고
사내의 머리에선 연신 땀이 솟고
사내는 눈가를 자꾸 훔친다
돌아서는 사내의 뒤통수가 계란과 닮았다.
5
밝은 방*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은 36살 때이다. 아버지의 가장 오래된 사진은 제대 기념사진이다. 지금은 이미 백발이 된 아버지가 군모를 삐딱하게 착용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우들과 카메라 앞에 선 육군하사 이 하사는 웃고 있다. 웃는 군인의 윗입술이 Ⅴ자 모양으로 패여 있다. 굶주림의 흔적만이 시간을 가로지르고 있다. 어디선가 구멍이 뚫린다. 밝은 빛이 쏟아진다.
배고픈 시절이었다. 젊은 군인의 아내는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결혼 직후 입대한 젊은 군인은 그의 아내에게 삼 년 동안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쉬지 않고 편지를 썼다. 쉼없는 연서 때문에 아내는 시어머니로부터 눈총을 샀고, 또 너무 바빠서 답장조차 쓸 수 없었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일로 허리가 녹을 젊은 아내의 눈매를 그리며 편지를 썼다. 그들이 함께 아이를 낳아 키우고, 누에를 치고, 논을 갈고, 그리고 함께 배가 고픈, 노랗게 바랜 시간들
아무도 부모의 어린 시절을 만날 수는 없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 26살의 젊은 군인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도대체 이 밝은 빛은 어디서 뿜어져 나오는 것인가.
* 카메라 루시다 : 롤랑 바르트의 사진에 관한 노트
6
뚱뚱한 그녀, 혹은 비둘기에게
물론 나는 새가 무거워서 날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문젠 무게가 아니라 그 무게를 들어올리려는 의지에 있어. 도도는 멸종되었고 닭은 사육되고 있어. 가령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에서 물풍선처럼 부푼 엄마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도 나에겐 작은 비행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녀의 발 밑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 신음하던 목조계단보다 먼저 그녀는 죽어버렸지만 그것은 그녀가 감행한 일생의 모험, 낯설고 두려운 공기 위로 사뿐히 자신의 전존재를 던지는 비행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녀를 운구하기 위해 곤도라와 인부가 동원되었지만, 애초에 외출을 그만두고 정신없이 먹어대기 시작한 것은 다 슬픔 때문 아니었을까? 그녀의 운구가 빠져나온 집도 화장되지만 ……그러니까 나는 그녀도 새는 새라고 생각해. 뚱뚱한 식욕보다 무겁게 그녀를 내리 누르는 중력, 슬픔. 경동시장통 신호등 위에 앉아 지나가는 차량 위에 하릴없이 똥이나 흘려대는 비둘기들. 가학의 도시에서 나보다 먼저 시민권을 얻은 저 권태의 새,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는 길 그건 타락해가는 자신을 용서하는 길 뿐이야. 숙취의 아침 슈퍼마켓에서 내가 해장으로 빵봉지를 뜯을 때, 조건반사적으로 내 쓰레빠 주변으로 딴죽거리며 모여드는 너희들에게 나는 몇 조각 빵덩어리를 던져주며 생각해. 아주 오래 전 날기를 그만 둔 나의 조상님들을,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연신 새로운 빵봉지를 뜯고 있을, 등에 퇴화한 날개자국이 흉칙하게 남은 내 모습을. 미친 듯 고함치는 햇볕 속에서 간신히 간신히 광기로부터 벗어나 있는, 조금씩 배가 나오려고 하는 존재.
7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의 사랑
이현승
이것은 웃음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게 있어 웃음은 보호막,
일종의 비누거품과 같다
문지르면 더 잘게, 더 많이 일어나는 거품처럼
손끝이 닿을 때마다 소스라치듯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럴 때면 나는 작은 거품들에 둘러싸인 비누가 손안에서 미끌거리는 것을 본다
작고 미끌거리고 단단한 그녀는
웃음풍선을 마신 사람처럼 기글기글 웃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
감당할 수 없는 간지러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흘러넘친다
흘러넘치는 소리를,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나는 그녀의 웃음소리에서 발견한다
작은 웃음으로 이루어진 보호막
웃음 속의 공포
이것은 공포에 관한 이야기다
웃음을 멈추려는 의지와
중단할 수 없는 웃음의 명령 사이에서
그녀가 미끄러지듯
분명하게
터져나오는 웃음 앞에서
나는 웃음을 금지하는 근엄한 독재자였다가
볼까지 빨개진 벌거숭이였다가
얼렁뚱땅 함께 웃고 있는 바보였다가
끝없이 터져나오는 웃음 끝에서 결국 눈물을 한 방울 짠다
그것은 슬픔 같은 것이고
그것은 공포이며
그것은 완전한 벌거숭이인 육체로서의 웃음이며
공포 속에서도 웃는 사랑이다
이것은 억압에 관한 이야기다
이현승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2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한 편의 시에 감상을 달아야지 하다가 덤으로 여섯 편의 시를 일독한다. 한 눈에 봐도 한 사람이 썼구나 확실하다. 부럽다. 나는 도무지 그렇지가 못했어서. 하여튼 시감이 비슷해서 좋다. 읽기에 좋다. 아니 사실 읽기에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공감 점수 80프로에 지극히 사적인 편애 점수 20프로를 섞어 읽으니 그럭저럭 와 개성있는 시인이네! 한다.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의 사랑'을 예전에도 읽었다. 읽고 그냥 덮어두었다. 무슨 여자가 손끝만 닿으면 웃냐? 거참, 사랑 나누기에 곤란한 여자이겠네...하면서, 시 역시 매력이 없다 했었다. 그런 골치를 뭣 하러 시로 엮느냐고 끙끙거리냐? 그건 고달픈 일....
시인에겐 대단히 민망한 일이나 나는 빈번히 건성건성 시를 읽는다. 어떤 시는 앉은 자리에서 세 번 이상 읽기도 하지만 대체로 긴 시다 싶은 시들은 한 눈으로 좍 읽고 마친다. 시 읽으면서 까지 스트레스 더할 일 있냐 며, 거저 즐겨라! 아님 걍 덮어두던가, 이도저도 싫으면 한 쪽켠에서 디벼 잠들던가, 한다. 결론은, 간지럼증을 (많이 탈 뿐만 아니라) 앓기까지 하는 여자 땜시, 시인을 검색하다가 뭉텅거려 읽어도 무난할 시편들을 저장한다. <오>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양희<말에 대한 생각>외1편 (0) | 2012.06.06 |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편들 (0) | 2012.06.04 |
백석의 시편들 (0) | 2012.06.01 |
김사인 <통영> 외 (0) | 2012.05.31 |
고영민 <통증> (0) | 2012.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