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조촐하게 살러 이곳에 왔다.
아니다 내가 명리를 버린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버린 것이다.
지나간 것은 청결한 극빈의 시절이었으므로 이 변방이 나를 불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나는 슬하의 것들을 데리고 조촐하게 살러 이곳에 왔다.
노루귀 매발톱 꿩의바람 벌개미취 노란줄무늬비비추 노각나무 이팝나무
초생달 물오리 같은 것들이 내 슬하에 새로 호적을 올린다.
잠 깨면 배갯잇에 달라붙어 있는 몇 올의 머리카락을 집어올린다.
문득 나는 잘못 살았다. 노동으로 생계를 세우지 못하고
간소하게 살지 못했다.
그게 내 인생의 초안이었는데, 이제 와서 잘못 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걸 되물릴 수 없다는 게 너무 아팠다.
어제 당신은 외로웠군. 내 뒤에서 말없이 끌어안은 것도 당신이었군.
이 새벽, 당신은 안개가 되어 내 누옥을 찾아온다.
나와 따뜻한 홍차라도 함께 마시고 싶어서였군.
누가 안개 속에 서서 연신 잔기침을 하고 있다.
당신은 버렸지만 길마저 버릴 수는 없었다. 무릇 길들이란 당신과 나의 삶의 유적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이 바뀐다.
길 위에서 지금은 내 곁에 없는 당신을 생각한다.
저녁이 되면 씩씩하게 울혈된 목청으로 떨림이 많은 노래를 하거나,
나무 아래에 앉아 친구들에게 그늘 밑의 이끼들아, 라고 시작되는 긴 편지를 썼다.
*
산책은 장엄하다.
날개가 없으니 나는 당연히 걷는다.
나는 위빠사나 수행 중인 스님처럼
천천히 걸어서 이 물가의 순간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몸 속에 황무지에는
일생을 다해도 채워지지 않는 물 없는 바다가 있다.
장석주 산문집<추억의 속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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