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by_ ssun
백련사 오솔길에 들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오솔길 넘습니다 초입부터 춘삼월 햇빛이 명랑하게 팔짱을 끼는데 어서 오라, 진달래꽃들 화사하게 손목을 잡습니다 오솔길이 만덕산의 품속으로 나를 끌고 갑니다 만덕산이 제 마음속으로 가느다랗게 오솔길을 불러들입니다 산길은 산의 높낮이로 굽이치며 깊어집니다 나도 오솔길을 따라 굽이치다가 잠깬 계곡의 물소리 만납니다 생각해 보면, 산길은 산의 마음을 따라가는데 나는 무엇을 좇아 어디를 아수라장 헤매었던 걸까요 계곡 물소리는 산의 중심을 깨우며 아래로 흐르는데 나는 또 삶의 어느 주변만을 허덕이다 위로만 눈길을 흘렸던가요 관목 숲 찌르레기 울음소리가 마음 한 켠 잔설처럼 녹지 않는 상처들을 아프게 찌릅니다 길섶에 앉아 쉬자니 문득 길섶의 풀꽃들이 말을 붙여옵니다 네게도 언제 오솔길이 있었던가, 마음의 뒤란을 느릿하게 휘어도는, 그런 포렴한 오솔길 하나 있었던가 묻습니다 얼굴 붉힌 나를 보며 싸리꽃이 까르르 잘게 웃습니다 일어서 걸음을 재촉하려니 칡넝쿨이 발목을 잡습니다 아서라, 찔레꽃이 옷깃을 붙들며 늘어집니다 그러나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갤 끄덕이며 한 송이 초롱꽃이 어둔 마음의 심지에 불을 밝힙니다 얼마쯤 왔을까요, 길이 제법 가파르게 아래로 미끄러집니다 마음의 경사를 늙은 소나무가 받쳐줍니다 굴참나무 숲도 연둣빛 어린것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스스로 환해집니다 어디선가 한 줄기 청신한 바람이 묵은 고요를 가볍게 흔들어 놓습니다 이윽고 오솔길이 끝나는 백련사에 다다를 무렵 기다렸다는 듯 수천의 동백꽃들 와, 꽃망울 터뜨립니다 저마다 허공에 화두처럼 꽃송이를 내다 겁니다 그걸 보던 만덕산 정상 백련 한 송이 화답하듯 빙그레 벙급니다 저물 무렵 하산하는 마음속으로 오솔길 하나 따라옵니다
몽골시편·1
──초원에서
몽골초원에는 어머니가 누워있다
초원의 살림살이를 떠맡은 생명의 어머니다
그 넉넉한 품속에서 모든 생명의 자식들은
풀을 뜯고 뛰어놀며 꽃을 피운다.
몽골초원에서는
풀이나 가축이나 사람이나 한식구다
서로 튼튼한 끈으로 이어져 있다
이들 중 하나라도 빠지면
초원의 질서는 사라지고 만다
빈틈이 없다.
가축들은 풀을 뜯으며 살을 찌우고
사람들은 가축을 기르며 살다 초원에 묻히며
풀들은 그 배설물이나 사체를 거름 삼아 자란다
모두가 초원에서 태어나 초원으로 돌아간다
초원은 그대로 삶과 죽음의 아름다운 현장이다.
몽골시편·2
──게르 체험
몽골 사람들의 양을 잡는 방식은 특이하다
물이 귀해 세수도 잘 할 수 없는 이들은
물 한 방울 쓰지 않는다 요란스럽지도 않다
칼로 배꼽을 조금만 흠집낸 뒤
손을 집어넣어 혈관 하나를 끊어 놓으면 그만이다
밖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피는 배 안에 그대로 고인다)
신기하게도 양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별 통증도 못 느낀 양 황홀히 눈을 감는다
그 다음, 입에서부터 차례로 가죽을 벗기고
배를 갈라 피와 내장을 꺼내 그릇에 담는다
아무 것도 내버리지 않는다
배설물은 초원에 뿌리고
가죽은 말려두었다가 옷을 만들거나 팔며
피와 내장은 따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마지막으로, 고기를 잘라 우유통에 담고
돌을 뜨겁게 달구어 넣어 밀봉한 다음
한두 시간 후 잘 익은 고기를 꺼내 먹는다
양은 자신을 길러준 사람들 뱃속에 묻힌다.
몽골시편·3
──어린 양 길들이기
몽골사람들의 어린 양 길들이기는 섬뜩하다
철이 없어 무리를 이탈한 어린 양에게
결코 벌을 주거나 매를 때리지 않는다
대신 어른 양을 잡을 때 옆에다 매어놓는다
다시 반복하면 이렇게 죽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한 무언의 훈계이다
어른 양의 처참한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양은
공포에 질려 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그저
사지를 바르르 떨며 털썩 주저앉고 만다
길들이기의 효과는 죽을 때까지 간다
무리의 결속력도 이렇게 해서 생긴다.
몽골시편·4
──몽골반점
초원 한가운데 있는 게르에 막 도착했을 때
나는 나의 눈을 의심하였다
오래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기다렸다는 듯
어서 오라 팔을 벌리며 웃고 계셨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똑 닮으셨을까
잠시 나는 옛날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노파는 내 손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숭늉처럼 구수한 우유 한 잔을 건네는 것이었다
노파의 몸에서 풍기는 늙수그레한 냄새가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의 아득한 추억을 건드렸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핏줄이 땡겼다 그때
내 엉덩이 어디쯤 몽골반점이 다시 돋는 듯
꿈틀거렸다.
몽골시편·5
──흘레
초원에서 말 경주대회를 보다가
생전 처음 말이 흘레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발정이 난 암컷을 위한 수컷의 구애는 집요했다
암컷은 국화빵처럼 부푼 생식기를 벌름거리며
애액을 질질 흘리면서도 수컷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아니면 좋으면서도 일부러 튕기는지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도망을 다녔다
칼집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장검을 뽑아든 수컷이
뒤를 쫓아 올라타며 장검을 겨눌 때마다
암컷은 여지없이 뒷발로 걷어차 버렸다
급소를 얻어맞은 수컷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수컷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한번 뽑은 장검도 거둬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열 번 이상을 반복했을까
수컷의 집요한 공세에 지쳤는지
길길이 날뛰던 암컷이 이내 고분고분해졌다
마침내 수컷의 장검이 국화빵을 찔렀을 때
처음엔 히히히힝 간지러운 소리를 내던 암컷이
나중엔 숫제 끄응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로 일대가 진동했다
순간 관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말 경주대회는 허탈해졌다
흘레를 마친 말들은 풀밭 위를 뒹굴더니
서로를 애무하며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모처럼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기보다는
야하다거나 민망스럽다기보다는
참으로 성스러운 생명의 한판이었다.
조장(鳥葬)
티베트 드넓은 평원에 가서
사십 대 여인의 장례를 지켜보았다.
라마승이 내장을 꺼내어 언저리에 뿌리자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이 달겨들더니 삽시에
머리카락과 앙상한 뼈만 남았다, 다시
쇠망치로 뼈를 부수어 밀보리와 반죽한 것을
독수리들이 깨끗이 먹어치웠다, 잠깐이었다.
포식한 독수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의식은 끝났다, 그렇게 여인은 허, 공에 묻혔다
독수리의 몸은 무덤이었다 여인의
영혼은 무거운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로 돌아갔다, 독수리의 날개를 빌어 타고
처음으로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었을 게다.
장례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유족들은
울지 않았다, 침울하지 않았다, 평온했다
대퇴골로 피리를 만들어 불던 스님의 표정도
경건했다, 믿기지 않았다
살아생전 못된 놈의 시신은 독수리들도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럴 때만 슬퍼한다고 했다.
언덕길을 내려오다 들꽃 한 송이를 보며
문득 죽은 여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평원의 풀과 나무들도, 모래알도, 독수리도
그냥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어귀에 이르자 꾀죄죄한 소년들이
허리를 굽히며 간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삶과 죽음이 한통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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