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聖 오월
망월 가는 이맘때쯤이면
아카시아 꽃봉지 들고 다가오는 산 전체에서
막 양치질한 딸아이
입내 같은 것이 났지.
꼭 죽음이 아니어도
이렇듯 신성이 찰나에 임하는,
잎새로 분사噴射되는 햇살 샤워;
낯뜨거워라
치약처럼 화한 꽃 한움쿰 입에 털어넣고
멀찍이서 묘역을 대하는데
죽어서 받은 거룩함도 살아 있는 날의 우연성, 덧없음,
어처구니없음에 잠깐 일어난 정전기 같다 할까
사실 벌거지만도 못한 삶이었는데
커다란 거품인 무덤들 둘레를
명함 돌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둘러싼다.
聖 오월; 아카시아꽃은 갑자기 재치기하고 싶은
흰 손수건을 흔들고....
2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온다던 사람 아직 보이지 않고
기다리다 못해 사자좌에서 일어난 사자
몸을 털며 크게 포효하니 고막이 찢어지고
이윽고, 꽃이 되었다가 별이 되었던
돌, 우박 떨어지는구나
이 비에 사람이 어떻게 오랴만
때로 진실은 약속을 깸으로써 오기도 하지
우리가 간절하게 기다리는 건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에 가장 온전하게, 와 있듯이
이 비 그치면
이 비 그치면
- <화엄광주華嚴光州>, '도청' 중에서
3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은 계엄사의 보도 관제로 일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공수부대가 여학생 유방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오열의 악성 유언비에에 현혹되지 말라'는 계엄 당국의 역선전 속에서
그 참상의 실재성을 유추할 따름이었습니다.
아, 너무나 원시적인 이 해부학적 비극이 우리의 '현대'였던 것입니다.
.....
공포에 질려 침묵에 싸여있는 서울의 한가운데 종로로 나는 유인물을 만들어 가지고 나갔습니다.
체포되었고, 계엄합동수사본부가 지휘하는 밀실에서 그해 여름 '지옥의 계절'을 보냈습니다.
....
이 지옥의 체험은 나의 고문의 체험을 말합니다.
고문은 그 수단이 아무리 단순한 것일지라도 사람의 뇌피질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멍자국을 남깁니다.
나는 지금도 머리 감다가 물이 코로 조금만 들어와도 숨이 헉 하고 멈춰버리고,
금방 그 지긋지긋한 고문실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 황지우, <끔찍한 모더니티>
4.
1971년 : 4월 대통령 선거, 5월에 재수하러 상경. 광화문 뒷골목에 진치고 날마다 탁구나 당구 치다. 1972년: 대학 입학. 청량리 일대에서 하숙, 그해 여름, 어느 날, 혼자, 몰래, 588에서 동정을 털고 약먹다. 약값을 친구들한테 뜯기도 하고 새 책을 팔기도 하다. 가을, 국회의사당 앞 탱크가 진주하고 학교 문닫다. 새 헌법 선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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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서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나고, 어디선가 바람이 다가오는 듯, 예감의 공기를 인 마로니에, 은행나무숲 위로 새들이 먼저 아우성치며 파닥 거리다. 그때 生을 어떤 사건, 어떤 우연, 어떤 소음에 떠맡기다. 그 활엽수 아래 生이, 그 개 같은 生이, 최루탄과 화염병이 강림하던 순간, 그 계절의 城 떠나다. 친구들 「아침이슬」, 「애국가」 부르며 차에 올라타다: 황금빛 잎들이 마저 평지에 지다. 1974년: 홍표, 권행이, 오걸이, 종구, 해찬이, 내가 부르는 이름들 끝에 10년 12년, 세월의 긴 꼬리표 달리다. 논산 훈련소 저지대에 엎드려, 황토에 얼굴 묻고 흐느끼다. 땅에 告解聖事하다. 그리고 더플백 하나와 군번 하나로 미지의 임지를 향해 北上 하다. 한탄강, 北緯 38도선, 야산, 트럭 뒤 먼지가 그리는 작전도로, 공공 사단, 세모 연대, 네모 대대, 가위표 중대, 당구장표 소대, 말단 소총수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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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비인칭 주어로 살다. 이따금 서울서 여자가 면회오고 그녀가 준 돈으로 동두천서 지친 性器와 잠을 자기도 한다. 미군 캠프 부근을 하릴없이 서성이다 흑인 병사에게 팔뚝으로 크게 말좆을 그려 보이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오후 늦게 귀대하다. 녹색이 서서히 갈색으로 옮겨가는 군자산, 갈색이 다시 灰색으로 내려오는 산협山峽, 으로 몰려오는 첫눈, 맞으며 첫 휴가 나오다. (아, 환속하다) "그 세상이, 먼저 건드렸어, 우리를." 우리들 중에 한 사람이 말하다. "아냐, 세상을 저질러버렸어, 우리가." 우리들 중의 또 한 사람이 말한다. 그날 영화 「빠삐용」 보고 말없이 헤어진다. 生을 탕진한 죄, 아무도 말 못 한다. 1975년: 다시, 도연이 정환이 들어가다. 철이 석희한테 그런 편지 오다. 아직 '아무데도' 못 간 그들에게 면죄부 띄우다. "너희는 살아 남아라. 날마다 새로 태어나라." 8월 부친 사망, 관보받다. 그날 수첩에 '도 한 사람 荷投' 이라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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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제대. 해군서 제대한 성복이와, 그해 가을, 신림동서 술 마시며 죽치다. 「歸巢의 새」 쓰다. 1977년: 다섯번째 만난 여자와 결혼하다. '무작정 살다' 6개월 후 이 표류에 한 사람 더 동승하다. 딸 낳다. 그때 도연이 출감하다. 정환이, 해일이 출감하고 곧 동부 전선으로 가다. 『文學과知性』 겨울호에 성복이 '시인'으로 혼자 떨어져나가고 석희, 군대에서 음毒 자살 기도하다. 1978년: "날 먼저 죽이고 나가라, 이놈아." 어머니 울면서 말리다. 親동생 끝내 광화문으로 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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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 지리멸렬해지다. 그 生의 먼데서 여공들 해고되고 한 달에 한 번 대구로, 김해로, 동생 면회가서 옷과 책 넣어주다. 1979년: 대통령 죽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멀리서, 모두, 한꺼번에 돌아오다.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1970> 中「활엽수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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