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고정희 <그대 생각>

미송 2023. 4. 18. 12:41

 

 

 

그대 생각 / 고정희

 

 

1

아침에 오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저녁에 십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꿈길에서 십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꿈깨고 오십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무심함쯤으로 하늘을 건너가자

바람처럼 부드럽게 그대를 지나가자

풀꽃으로 도장찍고

한달음에 일주일쯤 달려가지만

 

내가 내 마음 들여다보는 사이

나는 다시 석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2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3

융융한 서러움에 불을 지르듯

앞뒷산 첩첩이 진달래 피면

어지러워라 너 꽃불 가득한 4,

그대는 안산 진달래꽃으로 물드네

 

아련한 기다림에 불을 지르듯

언덕빼기 아롱다롱 과수꽃 피면

찬란하여라 저 비단결 강토,

그대는 안산 배꽃 사과꽃으로 물드네

 

수양버들 자락에 그대 생각 걸어놓고

남쪽 뜨락 까치집 바라보니

이 좋은 봄철에 차마 못할 일,

홍도화 붉은 심정 홀로 끄는 일이네.

 

 

4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듯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다가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거리에서 휘감고온 바람을 벗었을 때

이 세상 가장 이쁜 은방울꽃 하나가

바람결에 은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 이 세상 적시는 모든 강물은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으로

뒷모습으로 흘렀습니다.

 

 

고정희 <또 하나의 문화, 2011>

 

 

일주일 전인가부터 안약을 넣는다. 오늘도 컴퓨터 화면을 열기 전 안약을 넣는다. 바느질을 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 바늘귀가 보이냐 눈 안 아프냐. 아직은 괜찮다고 대답한다.

 

안약 병, 표면의 깨알 글씨를 읽는다. 눈의 자극 충혈의 일시적 완화.

 

그리움을 읽지 못할 까봐 간헐적으로 안약을 찾는다. 아직은 그럭저럭이나 먼 훗날에 일시적으로나마 완화되지 않을 눈의 충혈에 대비해 그대 생각을 큰 글자로 다시 타이핑한다. <오>

 

20140616-2023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