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쿤와르 나라얀 <나의 가까운 이웃>

미송 2023. 4. 4. 12:48

 

 

 

나의 가까운 이웃은

한 그루의 오래된 나무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종류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가지들이 매우 가까워서

작은 숲이 늘 거기 있는 것 같다

내 집의 베란다에

그래서 내가 원할 때면

손을 뻗어 그 이마를 어루만질 수 있다

 

그러면 나무는 소처럼

순한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나무와 나 사이에 깊은 우정이 자라나

바람이 불 때면

나무가 내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듯하다

아침 햇살이 나무를 깨우면

나무는 노인처럼 기침하며 일어나

나를 깨운다

 

자주 우리는

이것저것에 대해 몇 시간씩 이야기한다

각자의 언어로

그러나 언어가 차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고 나무는 말한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의 언어는 같다

겨울과 여름과 우기가 나에게 오는 것과 똑같이 나무에게도 온다

가을의 우울

봄의 즐거움

얼마나 많이 우리 함께 기념했던가

마치 우리의 생일처럼

 

내가 지쳐서

나무 가까이 앉아 있을 때마다

밤이든 낮이든

나무는 내가 하는 말을 충실히 듣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내 불안한 밤들에 아침을 데려오면서

 

나무의 팔들에 새들의 둥지가 있다

새들은 수시로 왔다가 간다

이따금 새들은 자신들의 집이라 여기고

내 집 안으로 날아와 쉰다

마치 이 집의 손님인 양

그래서 내 집은 새들의 둥지가 되고

내 소유물들은 덧없는 계절의 장식품이 된다.

 

-쿤와르 나라얀 <나의 가까운 이웃> (류시화 옮김)

 

  

 80년 된 목조 주택에 이사 오기로 결정한 데는 집은 낡았어도 마당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사 기념으로 집 옆에 큰 벗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곧 후회가 되었다.  바람이 불면 가지가 창문을 두드려 한밤중에 잠이 깨곤 했다

이후 나무와 나는 온전히 사계절을 함께해 왔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인간의 가슴도 때로 부러지며내 안에 불꽃이 있듯이 나무에게도 불꽃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무를 심은 지 스무 해가 넘어우리는 함께 나이를 먹어 가고 있다.

 

 이 시에서도 한 노인과 오래된 나무가 매우 가까이 살고 있다.  너무 가까워서 자주 하나가 된다나무는 서로의 기쁨과 슬픔희망과 실망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안다.  서로의 생각과 나날의 근심까지도 안다

그래서 둘을 나누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새들도 그들을 한 존재로 여기고시간마저도 동일한 속도로 둘을 동일한 결말로 데려가고 있다.

둘 다 젊었을 때는 각자 화려한 일상과 많은 활동에 몰두하느라 아마도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변화하는 계절들을 수없이 겪은 지금에야 서로의 동질성을 느끼고 있다.  오래된 나무의 미덕은 많은 옹이와 부러진 자국을 지니고 있음에도 수다스럽지 않다는 데 있다.  영원히 떠나 보낼 수밖에 없지만 떠나 보내지 못해 괴로워하지 않는다.

 

 인도를 대표하는 현대 시인 쿤와르 나라얀(1927~2017)은 북인도 럭나우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인도 고대 경전인 우파니샤드에서부터 불교와 마르크시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계를 섭렵해 문학적 토대를 다졌다.  이십 대 후반에는 유럽과 러시아를 여행하며 나짐 히크메트파블로 네루다 등을 만나 영감을 얻었다

이 직후 출간한 첫 시집 <차크라뷰하(둥근 배치)>는 힌디어 문학의 획기적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영어로도 시를 쓰는 대부분의 인도 시인과 달리 쿤와르는 평생 힌디어로만 시를 썼으며,  자신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모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그가 지난 수요일(11 15세상을 떠났다내가 만난 그는 예민하면서 밝은 유머를 지닌 사람이었다

또한 현실을 직시하는 눈과 새로운 사상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귀 기울여 들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내적인 겸손함과 친절함은 그의 시에 감동을 더해 주었다.  어떤 식으로도 자신을 가장하지 않는 시인이었다.

오래된 나무가 생명을 다하고 자연과 하나가 될 때,  그것은 새로운 나무가 탄생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저께 이 세상과 작별한 시인이 오늘 처음 한국어 속으로 방문했다.  이 첫 번역과 더불어 쿤와르 나라얀이라는 시인이 한국 독자의 마음속에서 재탄생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류시화>

 

* 힌디어 번역은 나의 가까운 친구이며쿤와르 나라얀 시인과 교류가 깊었던 폴란드의 인도문학 전공자 레나타 체칼스카의 도움을 받았다.

 

 

 

나무와 친구가 된 사람 사이에서는 왠지 토를 달기가 어렵다시인의 말투에 압도되어서 더 그렇다마당이 있는 집. 한 그루 나무와 20년쯤 친구처럼 살다보면 그림 속 순한 소처럼 될 수 있을까. 출근길 벚꽃 가로수를 지났다. 오늘 저녁부터는 한 이 삼일 비가 온다는데. 벚꽃 만개하면 꼭 비가 뒤쫓아오더라, 내가 입을 떼자, 그가 대꾸했다. 꽃부터 피워대며 하늘을 어지럽히니까 하늘이 격노해서 비를 쏟아붓는거야.

 

정말 그럴지도....

 

미세먼지에 시달린 몸 여기저기가 까끌까끌. 불쾌지수가 몹시 높은 날. 어제의 나는 종일 흐렸다.  나도 이제 늙어가나봐, 기분이 한 번 다운되면 회복이 점점 느려지네. 그래 점점 그렇지, 그 기분 나도 알고 있어. 그럴 땐 불교 공부가 최고지. 늙은 나무가 말했다.  <오>

 

20171119-2023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