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생각 / 고정희
1
아침에 오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저녁에 십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꿈길에서 십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꿈깨고 오십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무심함쯤으로 하늘을 건너가자
바람처럼 부드럽게 그대를 지나가자
풀꽃으로 도장찍고
한달음에 일주일쯤 달려가지만
내가 내 마음 들여다보는 사이
나는 다시 석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2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3
융융한 서러움에 불을 지르듯
앞뒷산 첩첩이 진달래 피면
어지러워라 너 꽃불 가득한 4월,
그대는 안산 진달래꽃으로 물드네
아련한 기다림에 불을 지르듯
언덕빼기 아롱다롱 과수꽃 피면
찬란하여라 저 비단결 강토,
그대는 안산 배꽃 사과꽃으로 물드네
수양버들 자락에 그대 생각 걸어놓고
남쪽 뜨락 까치집 바라보니
이 좋은 봄철에 차마 못할 일,
홍도화 붉은 심정 홀로 끄는 일이네.
4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듯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다가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거리에서 휘감고온 바람을 벗었을 때
이 세상 가장 이쁜 은방울꽃 하나가
바람결에 은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 이 세상 적시는 모든 강물은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으로
뒷모습으로 흘렀습니다.
고정희 <또 하나의 문화, 2011> 中
일주일 전인가부터 안약을 넣는다. 오늘도 컴퓨터 화면을 열기 전 안약을 넣는다. 바느질을 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 바늘귀가 보이냐 눈 안 아프냐. 아직은 괜찮다고 대답한다.
안약 병, 표면의 깨알 글씨를 읽는다. 눈의 자극 충혈의 일시적 완화.
그리움을 읽지 못할 까봐 간헐적으로 안약을 찾는다. 아직은 그럭저럭이나 먼 훗날에 일시적으로나마 완화되지 않을 눈의 충혈에 대비해 그대 생각을 큰 글자로 다시 타이핑한다. <오>
20140616-202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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