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許俊 /백석
그 맑고 거륵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그 따사하고 살틀한 볕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당신은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것이다
쓸쓸한 나들이를 단기려 온 것이다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 사람이여
당신이 그 긴 허리를 굽히고 뒤짐을 지고 지치운 다리로
싸움과 흥정으로 왁자지껄하는 거리를 지날 때든가
추운 겨울밤 병들어 누운 가난한 동무의 머리맡에 앉어
말없이 무릎 우 어린 고양이의 등만 쓰다듬는 때든가
당신의 그 고요한 가슴 안에 온순한 눈가에
당신네 나라의 맑은 한울이 떠오를 것이고
당신의 그 푸른 이마에 삐여진 어깻죽지에
당신네 나라의 따사한 바람결이 스치고 갈 것이다
높은 산도 높은 꼭다기에 있는 듯한
아니면 깊은 물도 깊은 물바닥에 있는 듯한 당신네 나라의
하늘은 얼마나 맑고 높을 것인가
바람은 얼마나 따사하고 향기로울 것인가
그리고 이 하늘 아래 바람결 속에 퍼진
그 풍속은 인정은 그리고 그 말은 얼마나 좋고 아름다울 것인가
다만 한 사람 목이 긴 시인은 안다
‘도스토이엡흐스키’며 ‘죠이쓰’며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일등가는 소설도 쓰지만
사랑하는 어린것에게 엿 한 가락을 아끼고 위하는 안해에겐 해진 옷을 입히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낯설은 사람에게 수백냥 돈을 거저 주는 그 인정을 그리고 또 그 말을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 말을
그 멀은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사람이여
이 목이 긴 시인이 또 게사니처럼 떠곤다고
당신은 쓸쓸히 웃으며 바독판을 당기는구려
허준 평북 용천 출신의 소설가로 백석의 절친한 친구. 1936년 2월 <조광>에 <탁류>를 발표 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으며
1946년 소설집 <잔등>을 펴냈다.
거륵한 ‘거룩한’의 고어. 평안 방언.
볕살 내리쬐는 햇빛.
단기려 ‘다니려’의 평북 방언.
뒤짐 ‘뒷짐’의 평안 방언.
게사니 ‘거위’의 방언(평안, 함경, 황해, 경기, 강원)
떠곤다고 ‘떠든다고’의 평북 방언.
한 줌 햇살에도 감사했던 시절. 소풍 끝내고 돌아간다며 시인들 하나 둘 떠나갔지. 홀가분하다 말했지. 당신의 경험치가 나의 경험치가 된, 어쩌다 목이 길어지게 된, 시인은 떠나간 이 떠나갈 이를 읊조리는 사람. 지워진 길들, 삶은 과정의 연속이었을 뿐. 마리아상 성당도 석가모니상 사찰도 집중을 잠시 돕는 편의점이었을 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 말이 의미있게 느껴져 미륵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떠올리는 오늘.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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