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의 辨 / 이 정문
9월.
굽어진 시골길을 걷는다. 가끔 산책로로 이용하는 이 길에서 봄날에는 앵두도 따 먹었고 초여름의 오디도 따 먹었다. 할머니가 홀로 사는 집 앞에서 조급히 익어버린 대추 한 알을 따 입에 넣는다. 아삭- 단맛이 혀끝에 돈다. 계절은 벌써 가을이나 느티나무 아래는 여전히 시원하다. 저쯤 코스모스가 줄지어 피어 있고 그 뒤의 넓은 벌판으로는 벼이삭이 익어간다. 나는 수행자의 자세로 앉아 시선을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멀리, 그러다가 어깨를 첩첩 맞대어 이어간 먼 산에 고정시킨다. 부끄러움이 많아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산은 저렇게 서 있나보다. 모습이 과묵하여 한결 보기에 편하다.
글은 늘 피곤하여 물 먹은 솜 무더기다. 문학은 가난하여 빈 수저와 같다. 훗날에 명성을 남겨봐야 그것도 남의 잔치에 불과해 이익이 없다. 그래서 글을 쓴다함은 근심거리를 옆구리에 끼고 사는 일이라, 가장 나쁜 부모는 문학적 재능을 유산으로 물려주지나 않을까.
조선시대의 시비평가 허균은 무엇에 쫓기듯 매일 글을 써야만 했다. 이는 잡글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사유(思惟)가 편치 않아 안주할 곳을 잃어서였을 테고, 누구의 시든 눈에 들어오면 꼭 평을 한 마디씩 붙이고 넘어갔다. 넘치는 재능이 청개구리의 예민한 본성과 같아 숨어살기 힘든 까닭일 것이다. 그러다가 사유의 천리마는 정통 유교(儒敎)라는 시대사상의 담벼락을 뛰어 넘고 말았다. 이단자만이 가는 노장(老莊)과 불가(佛家)의 계곡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임진왜란 후 영위사(迎慰使)로 임명되어 허균과 함께 중국의 문인 주지번을 영접했던 신흠은, 허균과 주지번이 몇 날 몇 밤을 어울려 유불도를 넘나드는 문학적 토론을 벌이는 장면에 탄식했다. “허균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그 모습도 또한 류(類)가 없으니, 이는 반드시 여우나 삵괭이, 뱀이나 쥐 같은 짐승의 정령이다.”
이는 유교 하나라는 작은 그릇으로 큰 그릇을 헤아린 결과겠지만 재능은 이렇듯 호기심과 상상력이 지칠 줄 몰라, 주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재능이 미천한 자들에게 그림자를 들씌우는 폐단이 있어, 허균은 스스로를 경박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이는 덩실 제멋에 겨운 춤이고 흥(興)의 얼굴이다.
사물을 제대로 보는 자가 있을까, 산마루 붉은 빛 적시는 석양이 같은 모습으로 모두의 눈에 비쳐질까, 사물에 기탁하여 저절로 일어나는 마음이 제각각이라면 석양에도 원래의 모습이 따로 없다. 덩실대는 춤사위로 세상을 각자가 가늠한다면 문학은 불변의 도(道)를 실어 나르는 수레라기보다는 변화무쌍한 흥(興)을 실어내는 꽃마차라서, 우리의 눈에는 사물의 “느낌”만이 비쳐진다. 그 느낌이 사물 본래의 모습이다. 그래서 석양은 네모도 되고 세모도 되고, 원도 되고 다각의 입체형도 되고...... 하여 나는 예측 못할 방향에서 엉뚱한 트집을 잡고 들어와 순식간에 나를 괴물로 만들어내는 아내의 재주를 용서할 수 있다.
예부터 교양 있는 왕은 문인을 질투했고 무지한 왕은 문인을 증오했으며 반푼 같은 왕은 문인을 괴롭혔다고 한다. 삼 백 명이 넘는 중국의 황제 중에서 문인을 높이 평가하여 진정으로 대한 왕은 한 명도 없었고, 제 명에 죽은 문인도 많지 않다고 한다. (<중국문인의 비정상적인 죽음> 중에서, 리꿔원 저)
이는 재능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화(禍)이거나, 넘치는 재능을 적절히 숨기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맛 쓴맛 신맛 등 혀를 돌고 돌아 담담(淡淡)한 맛이 그 절정이듯, 말씀 중의 말씀이 가장 평범한 말씀이듯, 화장술 중의 화장술이 방금 깊은 잠에서 깨어난 여인의 해맑은 표정이듯, 재능 중의 재능이라 할, “재능이 전혀 없는 재능”을 성취 못한 댓가일 수도 있다. 천수를 누리려는 재사(才士)는 죽림(竹林)으로 들어간다.
해가 기울어 찢겨진 햇살이 길바닥에 붙었다. 서쪽 먼 산 능선에 붉은 깃발의 백만대군이 몰려와 발아래로 밀려든다. 재능이 있음도 재능이요 재능이 없음도 재능이다. 그래서 나는 재능이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닌, 그러한 자로서 세간(世間)과 죽림(竹林)의 경계선에서 어정쩡하다. 이는 묵과할 수 없는 무위도식(無爲徒食)과 같아 난필이라도 휘두르고 싶게 한다. 글 쓰는 일도 습관이다. 습관이 반복되면 하나의 양심으로 자리 잡는다. 매일 쓰다시피 한 글을 거의 이 년간 뛰엄뛰엄, 죄책감이 커지면 그것을 달래려고 가끔 가볍게나마 써 내렸다. 그런 잡글로 만족하려 했다. 왜 그럴까?
순전히 두려움 때문이다. 십년간의 습작생활에 심신이 지쳐버렸는지 치열한 본게임에 임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정말이다. 혼을 빼고 피를 말리는, 매 마당마다 귀신을 불러내는 열두 마당 굿판을 어찌 다 감당한단 말인가. 재능이 있어 쉽게 쓰는 작가도 있겠지만 내 경우는 죽을 둥 말 둥, 허옇게 변해 넋이 나간 얼굴로 비칠댈 것이다. 겨우 다 완성했는가 싶으면 탈고 후에 닥쳐오는 고독감. 오 년 전에 단행본을 한번 썼다가 얼마나 진저리치며 침대에서 꼼짝 못했는지 모른다. 출판사에서 던져준 원고료가 방황경비로 다 나갔던 기억이다.
그리하여 죽림(竹林)으로나 들어갈까. 그러나 죽림은 재능의 절정인 재능 없음의 재능이 있는 자만이 가는 곳이라는데,
역시 오늘도 잡글이다.
2008년 9월 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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