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五感)에 호소하는 수필
그림으로 눈에 들어오는 수필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글이 봉긋봉긋 꽃을 피우며 달리는 듯합니다. 좋은 수필은 독자들의 오감(五感)을 자극합니다. 즉 작가의 체액이 그대로 글에 묻어나 독자로 하여금 머리가 아니라, 마치 몸으로 글을 읽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이런 글을 흔히 실감나는 글이라고 하죠. 이렇게 시각, 미각, 청각, 후각, 촉각에 호소하는 수필은 자기 일상사의 설명이나 추상적 사유에 집중된 오늘의 수필형태에 색다른 기법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게, 즉 미각에 호소하여 글을 쓴 작가라면 백석이 단연 으뜸이겠습니다. 백석의 시에는 그의 고향인 함경도 토종음식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함경도 사투리를 시에 그대로 도입하여 썼는데, 따로 백석 시인의 시어사전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므레하고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북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국수> 중에서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가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여우난골족> 중에서
얼마 전 바닷가에 갔다가 문득 백석의 <동해>라는 수필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앗차 했습니다. 어느덧 저는 시각에 의지한 수필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다라고 하면 파도, 수평선, 집어등, 구름, 백사장 등등 시각적 소재를 흔히 동원하는데 이것이 바로 글의 타성이겠습니다. 물론 바다는 한눈에 보이는 시각적 존재입니다. 일단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으로 파도소리가 귀에 들립니다. 그리고 해변에 앉아서 손으로 바닷물을 움켜줘 촉각으로 느끼기도 하겠습니다.
여기는 동해의 주문진항, 각종 어물이 좌판에 널려있고 사람들이 흥정을 해대는 시장바닥입니다. 갓 잡혀온 오징어나 가자미, 도다리나 문어에 먼 바다를 끌어들이면 어떨까? 그래서 바다가 각종 해물에게 붙잡혀 와 식탁 위에 오르면 안 될까? 말하자면 바다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보는 것이겠습니다. 가장 입맛을 돋우는 백석의 <동해>라는 수필로 대신하겠습니다.
동해 / 백석
동해여, 오늘밤은 이렇게 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닐면 어데서 닉닉한 비릿한 짠물 내음새 풍겨오는데, 동해여 아마 이것은 그대의 바윗등에 모래장면에 날미역이 한불 널릴 탓인가 본데 미역 널린 곳엔 방게가 어성기는가, 도요가 씨앙씨앙 우는가, 안마을 처녀가 누구를 기다리고 섰는가, 또 나와 같이 이 밤이 무더워서 소주에 취한 사람이 이웃들이 누웠는가, 분명히 이것은 날미역의 내음새인데 오늘 낮 물기가 쳐서 물가에 미역이 많이 떠들어 온 것이겠지.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날미역 내음새 맡으면 동해여, 나는 그대의 조개가 되고 싶읍네. 어려서는 꽃조개가, 자라서는 명주조개가, 늙어서는 강에지조개가, 기운이 나면 혀를 빼어 물고 물 속 십리를 단숨에 날고 싶읍네. 달이 밝은 밤엔 해정한 모래장면에서 달바라기를 하고 싶읍네. 궂은 비 부슬거리는 저녁엔 물 위를 떠서 애원성이나 부르고, 그리고 햇살 간지럽게 따뜻한 아침엔 이남박 같은 물바닥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놀고 싶읍네. 그리고, 그리고 내가 정말 조개가 되고 싶은 것은 잔잔한 물밑 보드라운 세모래 속에 누워서 나를 쑤시러 오는 어여쁜 처녀들의 발뒤꿈치나 쓰다듬고 손길이나 붙잡고 놀고 싶은 탓입네.
동해여!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조개가 되고 싶어 하는 심사를 알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는 밤이면 그대의 작은 섬- 사람 없는 섬이나 또 어느 외진 바위판에 떼로 몰려 올라서는 눕고 앉았고 모두들 세상 이야기를 하고 지껄이고 잠이 들고 하는 물개들입네. 물에 살아도 숨은 물 밖에 대고 쉬는 양반이고 죽을 때엔 물 밑에 가라앉아 바위돌을 붙들고 절개 있게 죽는 선비이고 또 때로는 갈매기를 따르며 노는 한량이데 나는 이 친구가 좋아서 칠월이 오기 바쁘게 그대한테로 가야 하겠습네.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친구를 생각하기는 그대 언제나 자랑하는 털게에 청포채를 무친 맛 나는 안주 탓인데, 정말이지 그대도 잘 아는 함경도 함흥 만세교 다리 밑에 님이 오는 털게 맛에 해가우손이를 치고 사는 사람입네.
하기야 또 내가 친하기로야 가재미가 빠질겝네. 회국수에 들어 일미이고 식혜에 들어 절미지. 하기야 또 버들개 봉구이가 좀 좋은가, 횃대 생선 된장지짐이는 어떻고. 명태골국, 해삼탕, 도미회, 은어젓이 다 그대 자랑감이지 그리고 한 가지 그대나 나밖에 모를 것이지만 공미리는 아랫주둥이가 길고 꽁치는 윗주둥이가 길지. 이것은 크게 할 말 아니지만 산뜻한 청삿자리 위에서 전복회를 놓고 함소주 잔을 거듭하는 맛은 신선 아니면 모를 일이지.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전복에 해삼을 생각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있습네. 칠팔월이면 으레이 오는 노랑 바탕에 까만 등을 단 제주 배 말입네. 제주 배만 오면 그대네 물가엔 말이 많아지지. 제주 배 아즈맹이 몸집이 절구통 같다는 둥, 제주 배 아뱅인 조밥에 소금만 먹는다는 둥, 제주 배 아즈맹이 언제 어느 모롱고지 이슥한 바위 뒤에서 혼자 해삼을 따다가 무슨 일이 있었다는 둥...... 참 말이 많지. 제주 배 들면 그대네 마을이 반갑고 제주 배 나면 서운하지. 아이들은 제주 배를 물가를 돌아 따르고 나귀는 산등성에서 눈을 들어 따르지.
이번 칠월 그대한테로 가선 제주 배에 올라 제주 색시하고 살렵네.
내가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제주 색시를 생각해도 미역 내음새에 내 마음이 가는 곳이 있습네. 조개껍질이 나이금을 먹는 물살에 낱낱이 키가 자라는 처녀 하나가 나를 무척 생각하는 일과, 그대 가까이 송진 내음새 나는 집에 아내를 잃고 슬피 사는 사람 하나가 있는 것과, 그리고 그 영어를 잘하는 총명한 4년생 금이가 그대네. 홍원군 홍원면 동상리에서 난 것도 생각하는 것입네.
2008-02-05 이 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