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참을 수 없는 것

미송 2009. 5. 10. 09:44

참을 수 없는 것 / 이정문

 

 

글을 제법 쓴다는, 아니, 써 보겠다는, 아니, 썼으면 하는 희망만 가진 사람들이, 무슨 문단을 통해 등단을 했습니다, 책을 몇 권이나 냈습니다. 문단경력 10년 차입니다, 무슨 문인협회의 회장이나 이사입니다, 등등 제 나름의 글 경력을 과시하며 모여들어, 재잘재잘 좁쌀 나부랭이 줄 세워 놓은 듯 한 꼴이라도 봐 줄만 하다. 어차피 나도 좁쌀 한 알갱이에 속하니깐 말이다. 언젠가 수필을 쓴다는 사람이 대상을 받았는데, 대상을 받은 후에 목소리에 힘이 주어졌고 하루아침에 문학의 대가로 발돋움하여 순식간에 주변의 작가들을 아우르는 평론가로 변했다고나 할까. 시요? 시가 무슨 문학입니까?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자의 나열인데 말입니다. 소설요? 소설이야 그냥 떠들어대는 것이 아닙니까, 요즈음에 볼 만한 소설이 어디 있어요. 수필이야 말로 자기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사유니깐, 나는 수필이 진짜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수필도 그래요. 00의 수필이 수필입니까? 그저 자기 유식하다는 소리고, 자기 잘났다는 말인데요- 이것까지도 나는 봐 줄만 하다. 어렸을 때는 다 자기의 아버지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자라기 때문이다.

 

물론 봐 준다고 해도 나에게 전혀 데미지가 없지는 않다. 자기 과시를 하며 대뜸 나를 눈 아래로 굽어봐 가르치려 대들 때, 자기의 문학만이 최고인양 온갖 편협함 속으로 세상을 처박을 때, 남의 작품을 함부로 떠올려 제 멋대로 난도질 할 때, 글 동네가 험하고 무섭게 느껴져 내 발은 저절로 뒷걸음질 치게 되어. 이제는 글마저도 멀찍이 물러나 자판을 두드리는 일도 뜸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마저도 봐 줄만 하다. 어린이들은 자기가 큰 인물의 후보임을 다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열 명의 글쟁이들이 모였다. 출신성분이나 성장배경 그리고 현재의 직업과 사회적 위치도 모두가 다르다. 단 하나의 공통점, 문학을 좋아하고 글을 쓴다는 이유로 회사원, 무직자, 장사꾼, 퇴직 공무원, 시의회 의원, 교사, 박사가 모였는데, 쩍 모이자마자, 단체를 결성하고, 이사를 선출하고, 회장을 뽑고 총무를 지명하여, 줄을 세우는 일이라서, 이게 자못 폭력적이랄까, 별안간 나는 어느 장군 밑에 소속된 병사가 되어, 00시인님, 00작가님, 대신에, 아이쿠 회장님, 총무님, 이사님하고 굽실대다가, 집에 돌아오며 가만히 생각하니 은근히 성질이 치밀어, 내가 왜 저 사람들 밑에서 이래야 되지? 내일모레 환갑인 내가 별안간 졸개 노릇하다니, 여기가 무슨 관공서 집단이나 기업체 조직인가, 물론 내가 감투 하나 쓰지 못해서 놓는 억하심정이 아니다. 글과는 상관이 없는 자기의 사회적 위치나 힘을 글 모임에 들이밀어, 회사에서 사장이니 글도 역시 사장이라는, 글 모임에서도 역시 자기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대접을 당연히 받고, 그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고 그 정상에 자기가 올라 있어야 한다는, 그런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볼 때, 그 밑에 내가 소속되었다고 타의적으로 규정되어 질 때, 정말 나는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분노를 느껴, 말없이 자리를 떠나 꾸물꾸물 멀리멀리 간다. 그러다보니 문학이 가뭇하여 내가 언제 글에 매달렸냐는 듯이 그저 지나는 개하고나 놀고, 영화구경이나 가고, 맛있는 음식이나 쫓다가, 문득,

 

화사한 봄날, 꽃들이 일제히 혓바닥을 내밀어 나른한 봄볕에 축 늘어뜨린 날, 춥고 배고픈 객지에서 쇠사슬이 목에 걸려 끌려가듯 먹고살기 위해 글을 썼고, 문밖만 나서면 그 눈, 눈, 눈, 칼날 같은 인간들의 눈들이 무서워서 대문을 닫아걸고 웅크리고만 살고, 언제 남편이 있었던가, 먼 세상으로 떠난 남편의 체취란 떨어뜨리고 간 그림자와 같은 딸 아이 하나라서, 죽어서 남편의 곁보다는 살아서 훨훨 나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어, ‘나비야, 청산가자’라는 마지막 작품의 서두를 달리다가 안타깝게 글기둥을 놓아버린 소설가, 마침 오늘이 박경리 작가 오신 날이 아닌 떠나신 날, 박경리 문학공원에 들려 그녀의 서재에 들어섰다. 썰렁하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학교를 나오고 서울로 이사를 와, <토지 3부>까지 쓰고 사위인 김지하 시인이 구금되어 있는 교도소가 원주에 있어서, 낯선 원주로 이사를 왔다던가, 바로 내가 들어선 이 서재에서 꼬박 토지 4부와 5부에 매달려 16년을 보냈고, 소설을 완성한 후에 텃밭이나 일구면서 작가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다가 서재를 작년에 떠났으니, “버리고 갈 것만 있어서 홀가분하다.”는 그의 시처럼 그는 <토지>도 버리고 서재도 버리고 자기의 이름도 버려 유언으로 묘비명마저 거부했던 것이다. 가슴이 먹먹해 온다. 서재에는 헌 가구 몇 점만이 벽에 기대어 있고, 녹이 슨 선풍기가 구석에 쭈그리고 있고, 밥상으로 쓰는 큰 상을 앉은뱅이책상 삼아 그 위에 국어사전이 있고, 원고지가 있고, 그 아래로는 실밥이 뜯겨 나가 속살이 드러난 방석이 놓여 있고, 주방으로 가니 오래된 금성냉장고가 있고, 화구 두 개가 달린 낡은 가스레인지가 있고, 그 앞의 작은 식당에는 임자 잃은 고독한 밥상이 먼지를 뒤집어써 적막강산이라, 하여 이것이 작가다. 책상 오른편으로 뚫린 창문 밖 멀리, 무심히 서 있는 치악산만이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가, 외로울 때 습관처럼 돌린 눈길이 그 산에 매달려 한참을 쉬어 갔던가, 하여 이것이 작가다. 턱에 올라 찬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조용히 사라지니, 이게 작가다.

 

이틀 후에 나는 늘 피곤한 안색으로 떠도는 서예작가 앞에 앉아있었다. 서예 경력 30여 년, 추사 김정희 선생의 법통을 이어받은 스승 밑에서 필법을 터득했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필력을 나누며 15년을 지낸 그는 제자 서너 명을 거느린 스승이었고, 격일제로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아파트 경비원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서예를 하시다니 골치 아프게 사시는군요.” 비위짱을 건드린 내 말이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할 수 없죠.” 판에 박힌 예술가들의 응수였다. 옆으로 길게 째진 그의 눈그늘이 한층 짙어 보인다. 입가에는 고집스런 경련이 인다. “예술이란 게 터득 할수록 헝클어지고 격을 갖출수록 무너지는 동네가 아닙니까, 막장이 늘 허망하죠.”라는 내 말에 그는 모자를 벗더니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성깔이 잔뜩 모아 든 입술을 삐죽대 울분 비슷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속물은 아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이 머리 위를 스쳐 뒷벽의 윗부분에 고정되었다.

 

“저는 20대 초반부터 전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스승을 구했고 평생 붓 한 자루로 살아왔습니다. 해서체 ‘한일자’ 하나를 터득하는데 일 년이 걸렸어요. 막말로 줄긋기로 일 년을 소비한 셈입니다. 그리고 예서체 전서체 초서체의 한일자를 터득하니 모두 삼 년이 지나더군요. 그때서야 서예가로서의 자세가 나오는 거예요. 붓 잡는 법을 겨우 터득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칠팔년을 또 이 지랄을 하니 비로소 붓 가는 길을 알게 되더군요. 지금 누가 서예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면 최소한 10년을 배우겠다는 다짐을 해야 받아 줍니다. 저의 스승은 엄격해서 작품을 출품하거나 상을 타러 다니면 야단을 치셨어요. 그런 시간이 있으면 공부나 더 열심히 하라고 말이에요. 그런 스승을 모셔서 그런지 저는 길거리에 간판을 내건 시시한 서예학원에서 몇 년 배웠다고 껍죽대는 사람들을 못 봐주거든요.”

 

길거리에 내건 간판? 서예학원?

이 말에 직격탄을 맞았는지 별안간 내 몸이 꾸물꾸물- 언제부터 생겨난 버릇인지 모르지만 모욕과 분노를 느끼면 나는 몸 뒤트는 지렁이 모양 꾸물댔다.

껍죽대는 사람?

몸이 계속 꾸물댄다.

나는, 나는, 글 스승도 없다. 문장 하나를 터득하려고 책에 매달려 지낸 일도 별로다. 몽땅 털어봐야 습작 10년이라는 세월이 고작이고 글 가는 길도 모른다. 하여 글 자세도 안 나온다. 그래서 서예로 치자면 간판 내건 학원에 깝죽대며 다니는 학원생? 다행히 상을 타러 다닌 적은 없다.

“사실 저 같은 놈은 국전에 출품해 봐야 한 칼에 떨어져요. 일정시대에 조전이라고 서예작가들을 몽땅 긁어모아 총독부 휘하에 두려는 목적으로 거국적인 전시회를 열곤 했어요. 그것이 바로 지금 국전의 효시입니다. 그런데 제 스승의 계보는 다 독립투사들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친일청산이 안 된 지금 뭐가 되겠습니까.”

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아니면 개인적 오버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나는 한국현대소설사를 공부하다가 친일문인들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문인들에게 ‘넝마주이’라고 놀림을 당하던 임종국 시인의 <친일문학론>을 텍스트로 하여, 이런저런 책을 섭렵하니, 한국소설의 효시인 이인직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비서요, 이광수는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히다가 기어이 일본 앞잡이로 작정하고 나선 사람이요, 단편소설의 효시인 김동인은 오락가락하는 정신으로 총독부를 드나들며 구걸했던 자요, 한국 현대시의 태두 서정주도 마찬가지고, 모윤숙이나 노천명도 그렇고... 그 명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어 한국문학 자체를 싹 삭제해 버리고 싶었던, 당시의 사정상 그럴 수밖에 없다고 뻗대며 조금도 사과하거나 반성하는 빛이 없던 그들이 정말, 정말,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내 머릿속에서 한글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고 싶지 않았었던가. 몸은 계속 꾸물댄다. 화가 날수록 요동하며 꾸물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느리고 끈적끈적하게 꾸우물 꾸우물-

 

“평생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 이것이 예술에 관한 제 소견입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붓글씨를 쓰는 게 무슨 취미활동처럼 되어버린 오늘이지만, 제대로 된 묘미를 제대로 맛보려면 삶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재능 있는 제자보다는 미련한 제자를 선호합니다. 재능이 있으면 현혹되기 싶기에 한 가지라도 끝까지 파고들지 못하죠. 미련한 제자는 한일자만 그려라 하면 주구장창 줄긋기만 하거든요.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말입니다. 공력이란 그런 끈기에서 생겨요. 필력이 강하고 깊어지죠.”

역시 나는 폼이나 내며 오락가락하는 서예학원의 원생과 같다.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작품도 없고 평생을 글에 바칠 각오도 없으며 재능뿐만 아니라 끈기도 부족하여, 언젠가는 매일 시를 읽고 일주일에 한 편씩을 암기하고, 소설 속의 좋은 문장을 숙지하며 타이핑하여 모아놓겠다는 결심을 했었지만, 작가의 기본인 그마저도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그만두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문학에 대해 느끼는 모욕과 분노는 모두가 내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것. 어설픈 글쟁이들이 아무리 설치든, 돈이나 위력으로 문인들의 모임을 난장판으로 만들든, 우리문학의 줄기가 친일파를 효시로 하여 그 청산 없이 내려와 원로들이 모두 비겁해 보여도, 이 모두는 창밖을 스치는 바람, 다 날려 버려라. 내 성깔로 봐서 그럴 능력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썰렁 찬바람만 감돌던 박경리 작가의 서재, 고독의 결과 삶의 한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이마에 부딪치던 빙결의 벽, 삐걱대던 거실 바닥, 임자 잃은 밥상, 이 모든 집념이 무서워 나는 실패한 작가려니, 진정 내가 참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나다.

꾸우물 꾸우물

 

2009.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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