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의 곡절 / 이정문
작품은 작가의 지적 수준과 예술적 상상력에 종속되기에, 작가는 자기가 쓸 수 있는 것만을 쓰게 된다. 그래서 작품에 대한 욕심을 접고 충분한 노력을 기울일 일이다. 아니면 어중간한 글을 내놓아 말없는 독자에게 냉소를 당하기보다, 발표를 도외시하고 제 글에 도취되어 마음이 가는대로 마구 써 내려도 좋을 일이다. 말하자면 습작의 자유로움과 즐거움이겠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내게는 분에 넘치는 일이라서 설사 시도를 해도 발표를 주저할 일이겠지만,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라든가 칸트의 철학을 사건화 시켜 소설로 써보는 것이다. 독자가 소설 한 편을 재미있게 다 읽고 나니 어느덧 어렵기만 한 상대성 이론이 저절로 터득되었다든가, 난해했던 칸트의 이성비판 철학을 마스트 하였다면 대단한 일이겠다. 소설이란 미묘하고 어렵고 알기 힘든 인생사나 자연사를 재미있게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일이라서 가능할 듯도 하다.
사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든가 <부활>을 독파하면 성경책은 따로 읽을 필요가 없다. 박애정신을 사건화 시켜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이다.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는 사회주의 사상의 배경과 핵심을 잘 전하고 있으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은 범죄심리학의 기본서와 같다. 또한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나 까뮈의 <이방인>은 실존주의 철학의 중심에 선다.
얼마전 가까운 문우가 왜 글을 안 쓰냐고 내게 물었었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머뭇 대다가 그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작품의 밑천이 없으니 내가 신봉하는 철학이라도 있느냐, 인생관이 확고하냐, 아니면 전문분야에 대한 남다른 지식이 있냐? 개뿔도 없는 주제에 뭐를 쓴다고 주접을 떠냐고......
그러나 내 수첩에 내 마음대로 뭐를 쓰든 나만 아는 일이라면 한 번쯤 시도를 해 볼만도 하여 얼마 전부터 끄적끄적 대기 시작했는데, 좀 쓰다 보니, 이 글의 서두에 작품은 작가의 정신세계에 종속된다고 분명히 밝혔지만, 혼자 생각하기에도 창피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처음은 좋았다. 늘 그렇지만 글의 서두는 어느 때처럼 높은 기개와 이상으로 출발하는 버릇이기에 이번에도 역시 좋았고, A4용지 석 장 정도가 그럭저럭 잘 나가줘서 홍알홍알 유쾌했는데, 그 다음부터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스토리가 요상한 쪽으로 슬슬 흐르더니 개에게도 못 주는 원래의 내 버릇대로 삼천포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어? 어? 얘기 줄거리가 좀 이상하네....... 하는 느낌이 들긴 들었지만 소설의 플롯을 제대로 잡자면 이대로 끌고 가봐야 하는 작업이라서...... 엉뚱한 여자를 무대 위로 모셔서 블라우스를 벗기고 몽실몽실한 유방을 만지작만지작 어쩌고, 그렇게 자꾸자꾸 나가야 할 형편이라서...... 문학 작품은커녕 잘 하면 야설이 되겠다 싶었지만 이왕 벗기기 시작한 여자의 몸인데 한번 끝까지 가보는 것도 내 성격이고, 아무도 못 보는 내 수첩에서의 일인데, 설마 성추행 정도가 아니라 강간까지도 못하겠는가. 그래서 입맛을 쩍쩍 다셔가면서 타닥타닥 써내려 가는데 짜릿짜릿은 필수고 이왕이면 더욱 야시시하고 끼가 넘치게, 더욱 섹시하고 세련되게, 남다른 성애의 표현을 고민고민하여 총동원하다 보니 어느덧 나는 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변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내 입가에서는 만족감이 흘렀으니 대작가들처럼 심오한 철학을 쉽게 설명하는 소설을 쓰지 못할망정, 내가 쓴 글에 내가 흥분을 했나? 요렇게 섹시한 여자가 세상에 있을 줄은, 이렇게 테크닉이 출중한 여자가 탄생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였다. 고백하자면 집에 소설묘사 사전 6권이 있는데 그 중에서 성애의 표현 장면을 모아놓은 사전만 열심히 타자했던 결과가 아니었는가 싶다.
다음날 어제 쓴 성애의 장면을 펼쳐놓고 이걸 삭제해야 되나 마나, 내가 원하는 소설의 주제는 뭔 개똥철학이 분명한데, 이 스토리가 타이밍에 맞춰 적절히 펼쳐졌는가 아닌가, 이런 장면을 꼭 집어넣어야 되는가 마는가, 아무리 성질이 급하기로서니 철학이라면 모름지기 형이상학이라서 늘 머리끝에서 맴도는 세상인데, 배꼽 아래로 단박에 내려간 나도 모를 이 현실이 타당한 것이며, 타당하다면 어떤 각도에서 분석이 되는지,
그래도, 그래도, 나도 우기는 데는 좀 소질이 있다. 이왕에 써 내린 줄거리라서 취소시키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순간적으로 떠오른 논리를 좀 전개하자면, 철학도 두 종류라서 고매한 플라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인간이 달성하기 어려운 철학이 있고, 현실에 곧바로 적용되어 인간이 달성하기 쉬운 철학도 따로 있을 테니, 정말로 진정한 철학이란...... 의식주와 같이 현실로 손에 잡히는 생철학, 굳이 비유하자면 시정잡배들의 철학이 더욱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섹스가 제격이지. 그 맛을 떠난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젊잖게 표현하여 종족번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섹스가 유구한 인간 역사의 발자취겠지만, 이브에게 잉태와 산고의 고통을 내린 하나님의 졸렬하고 치사한, 그러니깐 그깟 사과 하나 따 먹었다고 벌컥 화를 내고 내린 벌이 바로 섹스였지만, 하나님의 깊고 깊고 자비로운 배려를 우리 인간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는가, 창세 이후의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인간의 두뇌에 잉태와 산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임이라는 지혜를 하나님은 따로 준비해 주셔서, 오늘날의 섹스란 밑천 안 들이고 재미있게 가지고 노는 수단으로서의, 운동이 모자라서 몸이 허약한 사람에게는 헬스에 버금가는 레포츠로서 그 기능을 단단히 하고 있는 바, 그리고 더욱 훌륭하고 고맙기만 한 하나님의 배려로서 여성에게 시달리다가 시들어가는 남성들을 위하여 국에 퍼진 콩나물도 벌떡 일어선다는 비아그라라는 약을 만들 지혜도 근래에는 아낌없이 내리신 바, 섹스가 어찌 철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단 말인가.
쥐구멍에 볕들 듯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뒤바뀔 수도 있다. 그렇게 물구나무를 서도 제 키는 다 드러나는 법. 조금은 찜찜한 논리지만 우기다 보면 진리라서, 진리가 성립하는 필수조건이 바로 우기고 들어가는 악다구니라서 그날은 만족하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다시 그 장면을 펼쳐놓고 전개했던 논리를 대입시키니 아무래도 개운치가 않았다. 절대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부정하지 않는, 자기의 정체를 인정하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인도의 성자 나가르쥬나의 공관사상(空觀思想)과,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낸 형상에 스스로 도취해 그것을 진정한 사물로 알고 살아가므로 모든 우주는 결국 자기 안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원효의 유식사상(唯識思想)으로 출발한 서두에서, 그렇게 유식하고 잘난 체 지랄을 떨던 서두의 말미에서, 별안간 웬 여자가 발라당 옷을 활활 벗고 입술을 뽁뽁뽁 퍼붓고 뽀얀 가슴을 들이대 살쿵살쿵 비벼서, 나로 하여금 극한의 표현인 “그녀의 치마 속은 저항할 수 없는 노팬티였다.”로 흥분하게 했는가. 혹시 나에게 “저항할 수 없는 변태기질”이 있는가?
이 글의 서두에서 분명히 밝힌 바처럼 작품은 작가의 정신세계에 종속된다. 글을 봐하니 너도 그렇고 그런 놈이로구나 하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아- 존경스런 작가님 정말 대단한 경지에서 세상을 살아가시는군요 하는 소리를 들으려면, 약간은 근엄하고 고매하고 뭔가 고급스러워야지, 이렇게 앞뒤가 안 맞게 별안간 여자가 초를 치는 장면이나 불쑥 그리며 히히덕대고 억지논리나 갖다 붙여 고집을 세우니, 고생고생하여 글을 써 봐야 나도 뻔할 뻔자다. 이런 생각에 한참을 고민하고 의기소침하다가 드디어 개 줘도 안 갖는 원래의 내 버릇이 또 도졌으니, 삭제. 삭제- 그 여인은 컴퓨터 끝으로 사라졌다.
어디를 가든 그런 여인은 없었다. 번화한 시내를 젊음으로 수놓으며 재잘대는 20대 여자들도, 잘 익어 균형 잡힌 몸매의 세련된 30대 여자들도, 우아한 품위와 따듯한 표정을 겸비한 40대 여인들도, 이 세상 여자 그 누구도 내 습작 속에서 탄생시킨 여인을 뛰어넘을 수가 없으니, 새침하면 밤이슬 머금고 살짝 돌아앉은 풀잎이요, 방긋 웃으면 무지개 형형 끌어안고 콧등에 떨어지는 비눗방울이요, 눈물을 비치면 벼랑 끝 저 밑의 안타까움이요, 기뻐할 때는 9월의 벼이삭을 희롱하며 뛰노는 메뚜기다. 다가가면 슬쩍 물러나며 파르르 떨고, 물러서면 소리 없이 저만치 다가와 유혹하고, 달빛 젖은 눈동자에 하얀 손을 내밀어 4월의 벚꽃을 날리고, 애무의 끝에 스러지는 도화의 물결이라서, 나는 사라진 여인을 자꾸 떠올리려 애쓰는 것이다.
주인공이 여자의 손가락을 살짝 건드리며 어깨 뒤로 몸을 돌렸을 때, 여자가 허리를 뒤틀어 고개를 갸웃 왼쪽으로 숙여 하얀 목덜미를 드러냈는데, 그 다음에가 뭐더라? 도발적으로 여자가 남자의 가슴에 몸을 실으며 강렬한 숨을 토했는데, 그때 남자가 느낀 여자의 살결에 대한 느낌이 어땠지? 여자의 블라우스 속으로 남자가 손을 집어넣고, 눈결 같은 여자의 허벅지가 드러나고 그 다음은 어쩌고 저쩌고, 숭얼숭얼...... 아, 다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이렇게 그 여자가 그리울 줄 알았으면 삭제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내 버릇대로 역시 소설의 서두는 훌륭했다. 원효대사의 말씀.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낸 형상에 스스로 도취해 그것을 진정한 사물로 알고 살아가므로 모든 우주는 결국 자기 안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내 가슴 속의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