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강 / 이정문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나 소설을 쓰는데 내가 필요한 만큼만 딱 알려고 했다. 알려는 것 역시 세상에 흔하디 흔한 것이라서 서점에 가면 발길에 채이고, 뭔가 좀 배웠다 하는 사람들이 뻑 하면 칼럼에 자주 인용하는 <장자>라서, 또한 고귀하게 몇 십 년간을 옆구리에 끼고 가끔 들쳐보던 낯익은 <장자>라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생각하고 뛰어든, 가볍지만 약간은 학구적인 독서였던 것이다.
거대한 스케일의 “소요유”편도 좋다. 현실과 꿈이 뒤섞인 나비의 꿈 “제물론”편도 좋다. 인간 처세의 정수를 논한 “양생주”도 좋고, “덕충부”도 기가 막히고, 그렇게... <장자> 내편과 외편, 그리고 잡편까지 정독하여 드디어 마지막 33편의 “천하”편에까지 이르자, 일찍 내가 뭔가 조금만 알고 지나려는, 시나 소설에 필요한 만큼만 읽으려는 시도가, 조금만 더 읽고 더 알고 더 터득하여... 그렇게 슬슬 바뀌어설라므니...
장자 모든 편을 필사하며 두런두런 읽다가, 도대체 이런 사유의 출발점이 어딘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어서, 장자 사상의 근원이라는 <노자>에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었고, 노자를 빙 돌아 장자에 다시 도달하니, 이번에는 장자가 그렇게 비난했던 <공자>가 더욱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라, 60강이 넘는 공자 강의를 거듭 듣고 들어 3회독을 했던 것인데, 실천윤리에 불과했던 공자사상이 중국의 송나라로 넘어오면서 <주자학>이라는 형이상학으로 발전한 그 근원이 또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주자학의 밑그림은 “월인천강(月印天江)”이라더라, 한 개의 달이 공중에 떠서 천개의 강을 비추니, 강마다 훤하고 온전한 달이요, 달은 리(理)고 이를 가슴에 품은 강은 기(氣)라서, 사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면 품어진 달을 내면에서 발견할지라, 여기에 맹자의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대입시키면 뭐가 어쩌고, 뭐가 저쩌고, 하다가... 그렇다면 사람뿐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저 달이 품어져 있는가? 달이 사물의 본성이라면 개에게도 그 본성이 존재하는가? 즉 성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가 말이다.
겨우 겨우 여기까지 도달하니 갈수록 첩첩 산중이라, 세종대왕이 소현왕후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었다는 “월인천강지곡”이 곧 불교의 태산인 화엄종의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라, 주자학의 밑그림이 “월인천강”이라면, 또한 사물의 본성을 따지는 유학자들의 그 이론은 불교의 여래장 사상인지라, 선종의 선승들도 얼마나 실유불성(實有佛性)을 따져 고민했던가, 이러니 어느덧 골방의 샌님이 되어버린 나의 머리통이 온통 근질근질하여, 초췌한 얼굴로 그 다음 장을 넘기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에 겁 없이 내딛은 바다보다 더 넓다는 불교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근본불교와 부파불교가 어쩌고 대승불교가 어쩌고, 중론사상이니 유식사상이니 선사상이니 하며 헤매고 또 헤매고,
불교의 근원을 돌대가리를 갸웃대며 따지고 들자니, 하나의 사상을 제대로 알려면 다른 여러 가지 사상을 이에 대입하여 역사적 기원과 배경을 파악하고 사유의 이동(異同)을 명확히 해야만 하는 즉, 내 발길은 어느덧 희랍의 철학자를 거치고 헬레니즘 철학을 경유하여 헤브라이즘에 도달하고,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 어영부영, 어거스틴이 어쩌고, 토마스 아퀴나스나 윌리엄 오캄이 어쩌고, 그러다가 칼뱅인지 뭔지 하는 것에 도달해 눈을 떠보니 서구 근대철학의 아버지라는 테카르트가 나오고 스피노자가 나오고 라이프니찌가 어쩌고, 칸트, 헤겔, 니체, 베르그송, 프로이드, 융, 그러다가, 그러다가, 정신분석과 사회철학으로 흘러, 라깡이니, 자끄 데리다니, 미셀 푸코니, 요즈음에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들뢰즈의 알쏭달쏭한 철학에까지 이르렀고... 문득 달력을 들쳐봤다. 세상 살 날도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는데 수박 겉만 핥아 벌써 3년이 넘게 흘러간 것이었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도서 1-17)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도서 1-18)
새벽에 창가에 앉으니 서럽다. 손에는 며칠 전에 주문한 나가르쥬나의 <중론>과 바수반두의 <유식무경>이라는 책이 쥐어져 있으나 <앎>의 끝은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읽은 만큼의 읽지 못함이요, 아는 만큼의 알지 못함이라, 갈수록 나는 나에게 무지몽매한 이방인으로 다가와, 딱 요것만 이라는, 딱 요것, 그 요것이 세상에 없음을 문득 깨닫겠더라,
2009.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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