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퇴고실 164

쇼팽을 좋아하세요

(무언가풍 목소리가 무엇인지 이젠 기억조차 없지만) 찔리지 않으면 향기조차 맡을 수 없었기에 영혼의 상처를 감내해야 했을 때 유령같은 흰 사시나무,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때 유일한 진실은 흐르는 눈물뿐이었을 때 쇼팽을 들었지 비익조가 되려 했다는 쇼팽 가장 몽환적일 때가 가장 자신에 가까워질 때였다는 쇼팽의 말을 비웃지 않았지 전주곡을 다 듣기에도 짧은 생 벽장 밖으로 쏟아지는 고독들 외치네 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불가침의 권리를 모든 헌법에 넣으라고 건반 위 일락이 조각나는 순간 20130901-20240406

채란 퇴고실 2024.04.06

가을 눈동자

너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동공 속 일렁이는 빛줄기를 보는 일 기시감 깃든 별 하나 바구니에 담는 일 차분한 빗줄기 음절에 젖어든다 낯설기만한 세상이 비로소 낯설지 않게 된 건 너의 무한한 은유 덕분 축귀의 문장조차 명랑해진 건 너의 노래 속 정한 빛깔 나무 덕분 눈물 속에서 태어난 붓다가 히말라야를 들락이는 시각 타인이 된 모든 나를 핥는다 초록 눈동자 측백나무에 걸려있고 오늘도 누군가는 집을 찾아 헤매인다. 20151214-20240406

채란 퇴고실 2024.04.06

이것은 변기가 아니다

마르쉘 뒤샹 두루마리 화장지를 거시기에 대고 따발총을 쏘는 널 보면 뛰어가 기록하고 싶다 천형이다 꽁무니에 늘 붙어 다니는 너는 배설의 습성 같은 꿈을 꾸게 하는 너는 눈썹 찡그리며 미루긴 하지만 성자의 눈빛이 시선을 가로챌 때면 흐린 날도 견딜만해 질 때면 너의 이야기를 시원하게 써 주마 약속하지 삶은 논픽션 꿈은 픽션 그러나 사는 것 만한 허구가 또 어디 있나 그러니 삶이 소설이라고 아니라고 20160901-20230328

채란 퇴고실 2023.03.28

달빛 퇴고

컴퓨터 화면으로 달빛을 옮기던 밤 좀 전까지도 분명 꼿꼿했는데 별안간 꾸부정해 보이던 나무 때문에 고개가 기울었다 착시같은 현실에 놀라 콧등을 긁다가 콧등을 긁는 게 시방 내 손가락인지 먼곳으로부터 온 손톱인지 궁금하여 또 환한 달빛에 반하여 문법에도 맞지 않는 감상문을 쓸까 하였다 달빛으로 물들이는 일은 그리운 사람을 창가에 두는 일과 비슷하여서 굴 속을 벗어날 때도 빗속을 달릴 때도 점령군처럼 따라오던 달빛 퇴고하지 않은 시 같은 그 달빛 바라보다가 나 또한 그런 풍경으로 씌여지길 기도했지. 20170429-20221126

채란 퇴고실 2022.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