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퇴고실 164

사슴의 뿔

비가 멎질 않았다. 신열을 견디며 수정은 바닷가 모텔에 혼자 누워 있었다. 댓잎에 쓸리는 아린 감각처럼 웅성거리던 빗물이 덩그르르 떨어졌다. 핏방울이었을까. 아랫도리 어디쯤이 붉은 유령의 집처럼 휑뎅그레하여서 수경은 숙명적 물음을 물수제비로 띄우다 잠이 들었다. 잠깐 꿈을 꾸었을까. 중구난방 흩어지던 사념들이 차분해져 다시 눈을 떴을 때, 잠이란 가련한 신의 축복이로군, 중얼거렸다. 무엇이든 도를 지나치는 게 문제였다. 방어기제를 잘 동원하던 수경은 안으로 돌돌 말리는 법을 터득했다. 억측과 모순에 타협하지 않는 자세. 그런 기본자세로 수경은 종종 잠을 택했다. 잠을 자야만 꿈을 꾸는 건 아니었다. 자정 2시 무렵 눈을 뜬 채 꿈을 꾸고 있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귀엽게 느껴졌다. 꿈을 꾸는 것보다..

채란 퇴고실 2021.12.02

위하여

깨어진 마음들을 제 자리로 돌리는 유리잔의 위력이 커피의 첫모금을 앞질러갔다 어제의 신혼 사진이 오늘의 영정 사진으로 돌변하고 부대끼다 보니 빨개졌는지 빨갛게 태어났는지 모르겠는 그녀의 입술 그녀 앉는 자세는 하루에 또 몇 번씩이나 바뀌는지 천장은 하나인데 열린 집들은 변덕스럽고 취향은 개 같다 종이엔지 혀엔지 베어나간 나이테들에선 연세와 무관한 생강냄새가 난다 하릴없이 종이비행기를 꽂고 놀 때 마침표 없는 글자들만 다음 생의 유전자를 위해 뛰어 다니고 다리를 꼰다고 참견하는 일, 그런 일일랑 전문가들에게 맡긴 채, 소심한 춤사위를 20190601-20211126

채란 퇴고실 2021.11.26

고담

인생 하프타임에 사용했던 무수한 쉼표들 열고 싶지 않았던 젖은 빗장들 눈부신 빨래들과 텅 빈 세탁통 사이를 오가며 써댔던 서약서가 서랍에 있었다 가령, 한결같은 마음 시를 써 줄 정도의 극진함 은은한 불꽃으로 꺼지지 않을 독침을 맞으면서도 끝끝내 지켜낼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신산한 삶에 위안이 되고 존재 이유가 될 수 있는 어쩌고 저쩌고들로 빼곡한 사랑 서약서 찢어발개고 싶어 붉어진 볼따구니로 안녕이란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입니까 20051028-20211028

채란 퇴고실 2021.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