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종이 위에 시를 쓰지 않는다. 풀잎과 강물, 벽과 거리,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내면의 미궁 등 삶의 수많은 지면 위에 쓴다. 이 구 체적이면서 추상적인 삶의 지면에 시인은 자신의 기억과 운명과 깨달음을 정성스레 쓴다. 마치 경전에 글자 하나를 새길 때마다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는 옛 목공의 마음과 다를 것이 없다. 정호승은 새벽에 내린 흰 눈 위에 시를 쓴다. 그의 시의 배경에는 계절과 관계없이 자주 눈이 내린다. 혹은 그의 시의 계절은 대체로 겨울이다. 정호승이 시린 눈 위에 쓴 시들 에서는 시대의 고통을 끌어안았고, 에서는 상처받은 인간의 손을 잡아주었다. 정호승의 시심(詩心)이란 착하고 맑은 인간의 마음 자체이며, 타인과 나의 고통은 서로 이어져 있음을 증명해왔다. 실제로 정호승의 시에서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