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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규 <죽은 새를 위한 메모>

당신이 내게 오는 방법과 내가 당신에게 가는 방법은 한 번도 일치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전언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이 꽃봉오리처럼 터지거나 익은 사과처럼 툭 떨어질 때 비로소 당신이 당도한 걸 알아차린다 당신에게 가기 위해 나는 구름과 바람의 높이에 닿고자 했지만 당신은 언제나 내 노래보다 높은 곳에 있고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낯선 목록에 편입되어 있다 애초에 노래의 형식으로 당신에게 가고자 했던 건 내 생애 최대의 실수였다 이를테면, 일종의 꿈이나 허구의 형식으로 당신은 존재한다 모든 결말은 결국 어디에든 도달한다 자, 이제 내가 가까스로 당신이라는 결말에 닿았다면 노래가 빠져나간 내 부리에 남은 것은 결국 침묵,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발설했고 당신은 아마 먼 별에서 맨발로 뛰어내..

내가 읽은 시 2023.04.27

녹슨 십자가

녹슨 십자가 / 오정자 깨달음을 믿지 말라 이정표일 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부르는 순간 그는 우상이 된다 이름의 권위로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은 현재진행형 길 걸어가는 저 사람의 모자 위에 또 모자를 씌우지 말라. 모세가 불길에 휩싸인 떨기나무 아래서 신의 정체를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불길 속에서 들려온 대답은 “나는 나다! (I AM WHO I AM)”이었다. 즉 나는 존재 그 자체라는 말이었다. 오 시인의 의 사유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며 시의 분수령으로 삼는다. /이름의 권위로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란 언어다. 신은 인간의 언어로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게 대답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인간들의 언어에 대한 불신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뜻과..

바람의 일기 2023.04.20

고정희 <그대 생각>

그대 생각 / 고정희 1 아침에 오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저녁에 십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꿈길에서 십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꿈깨고 오십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무심함쯤으로 하늘을 건너가자 바람처럼 부드럽게 그대를 지나가자 풀꽃으로 도장찍고 한달음에 일주일쯤 달려가지만 내가 내 마음 들여다보는 사이 나는 다시 석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2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3 융융한 서러움에 불을 지르듯 앞뒷산 첩첩이 진달래 피면 어지러워라 너 꽃불 가득한 4월, 그대는 안산 진달래꽃으로 물드..

내가 읽은 시 2023.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