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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

열흘 연휴. 첫날에는 전주에 다녀왔다. 전라도 김치의 젓갈맛 깻잎 고춧잎의 삭힌 맛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음식에 정확한 맛을 내는 사람을 보면 왠지 정직하고 화끈한 성격일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숯불갈비. 콩나물해장국. 꼬막정식. 치즈구이. 아무 식당을 들어가도 전라도는 맛있다. 토요일 오후 5시까지 사회복지협회축제장에서 드림스타트 홍보를 하고 돌아와 전라도로 향했는데, 가면서 사진을 찍어 아들에게 보냈는데, 아들은 내가 전라도로 가고 있다고 하니까 맛있는 거 많이 드시라고 문자를 주었다. 어쨌든 마부는 어떨 때 보면 사람이 아니라 달리는 말 같고, 아들은 아들이 아니라 오빠 같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여기가 천국이야 소리쳤다. 모텔 매트리스는 너무 미끄럽고 베개는 너무 푹신했다. 불편..

낙서와 독백 2023.09.19

야생초 편지

지난 광복절에 출소하신 선생님 한 분이 편지를 보내 왔는데, 집에 들어가서 처음엔 물건을 찾으러 이방 저방 다니고 왔다갔다 하는 게 너무도 이상했다는 거야. 이십 년을 팔 닿는 거리에 물건을 두고 생활하다가 갑자기 넓어진 공간에서 물건을 찾아 왔다갔다하는 게 너무도 낯설었다는 거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극미와 극대의 세계만이 있는 거야. 극미의 세계는 독방 속의 지리한 일상들이고, 극대는 징역 밖의 그리운 이들과 세상 소식들이지. 중간이란 게 없어. 극미와 극대만을 체험하는 사람은 성격도 그와 비슷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작은 일에 지극히 소심하게 집착하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큰 꿈을 품기도 하고, 나한테서 혹시 그런 것 느끼지 못하겠니? 그러기에 우리 수인들에게 있어 이 ‘편지하는 행..

좋은 문장 2023.09.11

김종삼 <5학년 1반>

5학년 1반입니다. 저는 교외에서 살기 때문에 저의 학교도 교외에 있습니다. 오늘은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므로 오랜만에 즐거운 날입니다. 북치는 날입니다. 우리 학굔 높은 포플러 나무줄기로 반쯤 가리어져 있습니다. 아까부터 남의 밭에서 품팔이하는 제 어머니가 가물가물하게 바라다보입니다. 운동 경기가 한창입니다. 구경 온 제 또래의 장님이 하늘을 향해 웃음지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가져온 보자기 속엔 신문지에 싼 도시락과 삶은 고구마 몇 개와 사과 몇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옮겨 놓는 어머니의 손은 남들과 같이 즐거워 약간 떨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품팔이하던 밭이랑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고구마 이삭 몇 개를 주워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잠시나마 하느님보다도 숭고하게 이 땅..

내가 읽은 시 2023.09.07

김유정과 마르께스의 여자들

감춤의 미학 3년 전 김유정역을 지난 적이 있다. 기차역의 본래 이름이 신남역이었다는 설명과 함께 김유정의 예술혼이 깃든 곳곳의 흔적에 관해 해설사의 해설을 들었지만, 사전지식 없이 따라나선 문학기행은 수학여행으로 끝났다. 가끔은 퍼포먼스에 시간을 처박기도 한다. 우연한 아침, 김유정의 동백꽃을 읽었다. 두 발로 둘러봤을 때보다 명확하게 한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길, 역시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다. 명작으로 불리는 작품 안에는 불후의 인과 작용이 숨겨져 있다. 시간을 초월하고, 보편적 욕구를 만족시키고, 편협한 결론으로 독자를 구속하지 않고 어느 때 그리고 누가 다시 읽어도 희망을 꿈꾸게 만드는 비결을 가졌기에, 사랑받는 것들은 사랑받을 짓을 한다는 말이 생겼을까. 마름의 딸 점순이는 열일곱 살. 춘..

채란 문학실 2023.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