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단지(斷指)한 처녀> 단지(斷指)한 처녀/ 이상 들판이나 낚에 핀 꽃을 똑 꺾어 본 일이 없다. 그건 무슨 제법 야생 것을 더 귀해한답시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대체가 성격이 비겁하게 생겨먹은 탓이다. 못 꺾는 축보다는 서슴지 않고 꺾을 수 있는 사람이 역시 ─ 매사에 잔인하다는 소리를 듣는 수는 있겠지만 ─ 영단(.. 운문과 산문 2009.08.31
최상호<시에 대한 커밍아웃> 시에 대한 커밍아웃 / 최상호 그건 트릭이에요 내가 고상한 말로 아주 그럴듯하게 뽀대나게 시를 써서 밑천 없는 본질을 감추었어요 그것은 순진한 당신을 겨냥한 의도확대의 오류일 뿐인 걸요 가령, '도시의 거친 바다에서 울부짖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라고 쓰면 당신은 도회지의 푸른.. 운문과 산문 2009.08.31
최정란<커밍아웃> 커밍아웃 / 최정란 아직도 엄마로 보이니, 아직도 여자로 보이니, 아직도 내가 사람으로 보이니? 쇠사슬 묶인 발목을 절그렁거리며 어둠을 질질 끌고 꿈과 생시를 넘나든다 처음에는 다름 아닌 내가 누구보다 더 두려웠다 아마도 사백구십구 년 전이었을 것이다 거울을 보지 못하고 두려.. 운문과 산문 2009.08.31
정지용<유리창> 유리창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 운문과 산문 2009.08.30